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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Aug 05. 2020

나를 나답게 해주는 이름

이름을 바꾸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흔치 않은 이름

살면서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쑥스러움이 많던 어린 시절, 흔치 않은 이름은 스트레스의 원천이었다. 단번에 내 이름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재차 확인하는 질문이 거듭될 때마다 점점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몸은 움츠러들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개학 첫 날을 그럭저럭 넘기기 위해서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출석부를 훑어보던 선생님들의 눈길은 어김없이 본 적 없는 내 이름에서 멈추곤 했다. 그럼 즉시 당첨! 호명되어 책을 읽거나 발표를 해야 했다.


여덟 살 즈음, 온 가족 앞에서 선언했다. 이름을 바꾸겠노라고. 내가 정한 이름은 '주디'였다. 그 시절 세계 고전 만화책 '키다리 아저씨'에 나오는 깜찍한 주디에 반해버려서였다. 이 말을 들은 아빠는 쿡쿡 조용히 웃었고, 언니와 엄마는 대놓고 고개를 젖히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뭐야, 딸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엄중한 결정 앞에서 왜 웃는 거지?


너무 웃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엄마는 말했다.  

"넌 삐지면 주디가 댓 발이나 나오니까 그 이름이 딱 좋겠다"

 

그렇다... 주디가 경상도 사투리로 주둥이라는 뜻이라는 데까지는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던 것이다. 주디는 내게 어여쁜 서양식 이름이었지만, 경상도 억양을 넣어 주↗디→라고 읽으면 금세 주둥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개명의 꿈은 좌절됐다. 내 두 번째 이름이 될 뻔한 주디를 쉽사리 떠나보내지 못한 가족들은, 지금도 가끔 주디라고 부르며 나를 놀린다. 그때마다 이름을 바꾸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사춘기가 찾아와 자의식이 넘쳐날 때는 이름 콤플렉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되려 과한 애착이 생겨났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는 항상 유일한 이름이어서, 이름은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확실한 장치였다. 이름이 곧 나였던 것이다. 내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대개 "어머, 독특하고 예쁜 이름이네요"라고 했다. 그 칭찬을 마치 내가 독특하고 예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으로 마음대로 해석해서 듣는 요상한 공주병을 앓게 되었다.   



내가 내게 지어준 새 이름

이름과 맺은 이 나르시시스트적인 관계는 'Chloe'라는 제2의 이름을 만들면서 해소되었다. 주변에 편의를 위해 영어식 혹은 불어식 이름을 만들어 쓰는 사람이 꽤 있었다. 나는 해외생활을 수년간 하면서도 서양식 이름은 기를 쓰고 거부해왔다. 이십 년 넘게 쓴 이름을 저버리는 것이 자신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져서다. 이름은 내게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도구기도 했으니깐. 


통역사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국어 발음에 익숙지 않았던 해외 고객들이 민망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예 나를 부르지 않는 쪽을 택한다는 걸 알게 됐다. 급할 때는 저 멀리서 달려오거나, 서로 말을 놓았는데도 난데없이 존칭인 '마담'으로 부르기도 했다. 발음하기 편한 이름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직접 고를 수 있다니, 약간 설레기도 했다. 이후로도 계속 외국에서는 클로에란 이름을 쓰고 있다.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나서 '클로에 너 말고 다른 클로에'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내게도 동명이인이 생긴 것이다. 그제야 이름 자체로는 모음과 자음의 조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을 실감했다. (물론 이름을 주디로 바꾸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나를 나답게 해주는 이름

알고 보니 이름이 흔하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이름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우선, 그 이름으로 불리는 '나'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엄마는 '답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엄마는 엄마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난 늘 그 말에 반감이 들었다. 한 사람을 정해진 틀과 역할에 가둬두는 것 같아 답답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다. '누구답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이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닌다면? 정의가 한 두 단어에 그치지 않고, 한 권의 책으로도 쓸 수 있을 만큼이 된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 아닐까? 내 이름에 담긴 '나'라는 사람의 정의가 풍부해질수록, 이름이 가진 의미 또한 풍부해질 것이다. '클로에답다'라는 말이 지니는 의미를 다양화하는 작업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지.


두 번째로,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다. 이름이 주어지고 그렇게 불림으로써, 그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름 없는 물체나 사람을 기억할 도리가 없다. 또한 이름이 있더라도 불리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금세 잊히고 만다. 라는 사람은 절대로 홀로 나다워질 수 없는 것이다. 나를 불러주는 사람들, 특히 하루에도 몇 번이고 깊은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로 인해 나는 나에게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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