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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un 25. 2020

내향적인 성격, 유럽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

조용한 사람에게 관대하지 않은 사회

유럽 사회는 내향적인 사람이 자라기에 척박한 땅이다. 내향인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기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맞서야 한다.


'부끄럼을 너무 많이 타'

'사회성이 없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못 해'

'친구들이랑 안 놀고 집에만 있어서 걱정이야'


내향적 자질을 나쁘게만 보는 시선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볼 때면 커다란 연민을 느낀다.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라 하지만 실은 인기 있는 사람의 유형은 한정적이다. '인싸'여야 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데 거리낌 없어야 한다. 외향성의 정도로 한 사람의 매력 지수가 매겨진다. 내향성을 핍박하고 외향성을 숭배하는 서양의 문화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처음 프랑스에 와서 식탁에서 펼쳐지는 피 튀기는 토론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자고로 밥상머리에서는 조용히 밥만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옳다고 믿어오던 밥상머리 예절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왜 한마디 더 하려고 핏대를 세우는지 어리둥절했다. 이내 토론에 끼어들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 곧 나의 미래일 테니깐...


원래 나는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입을 잘 열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관찰하는 일이 은밀한 취미였다. 흐르는 침묵에도 큰 책임이나 불편을 느끼지 않는 편이었다. 오히려 침묵을 메우기 위해 의미 없는 말을 뱉은 뒤, 밀려오는 후회가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게다가 프랑스의 어떤 모임이든 굳이 내가 말을 보태지 않아도 오디오가 빌 틈이 없으니, 더 조용해지곤 했다.


이곳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목소리 높여 의견을 말하지 않으면 지루한 사람, 생각 없는 사람, 나아가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까지 손쉽게 낙인찍혔다. 학교나 단체 모임에서 처음 본 사람들은 나를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흥, 나는 가끔가다 똑똑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데?'

나름의 노력으로 기분 나쁜 오해를 풀어야 했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먼저 말을 걸어 보기도 하고, 재미없는 모임에서 되지도 않는 말을 보태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침대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게 억지로 에너지를 쏟고 나면 다시 채우는 데엔 두 세배의 시간이 걸렸다. 나와 멀어지는 생활은 결국 공허함만을 안겼다.


그렇다면 난 반사회적인 사람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작위의 사람을 대거로 만나는 건 힘든 일이지만, 대체로 만남은 즐거운 자극이었다. 무엇보다도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즐거웠다. 다행히도 이곳에서 만난 몇몇 친구들과는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애쓰지 않고 가장 편안한 내 모습일 때만 찾아오는 행운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외향성이 꼭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이상은 수박 겉핥기식 관계 맺기를 지양하고, 소수라 하더라도 그들과 깊은 정서적·지적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나고 자랄 수 있어 다행이다. 조용한 것이 해가 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자랄 수 있었으니까. 그뿐이랴. 튀지 않는 성격은 좋은 자질로, 침묵은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내가 나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청소년기에 타고난 성격을 두고 나쁜 말만 들었다면, 필연적으로 외향적인 성격을 '연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다 자란 후 새로운 문화권에 와서, 제2의 사춘기를 맞아야 했다. 외향성을 우대하는 문화는 토론과 사교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토론에서 말로써 논리를 증명하고, 파티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이미지를 드높여야 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것이 이상적인 성격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반면 내향성에는 부정적인 수식어만이 달라붙게 되었다.


프랑스에 혼란스운 시기를 거치며, 나 역시도 자신을 소심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 방황 에 그저 내향성이 강한 것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게다가 남들 앞에 서는 일이 두렵지 않은 내향인이라는 것도.
많은 경우 소심함과 내향성을 혼동하고, 외향=적극적, 내향=소극적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내향적인 사람은 내부 세계에 적극적, 외향적인 사람은 외부 세계에 적극적이라는 해석이 더 옳지 않을까?


내 성격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도 배웠다.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멈추는 것,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것,
'함께'와 '혼자' 사이에서 나만의 균형을 찾는 것이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나로 태어났으니깐 나로 살아가야만 해. 자학에 사용하는 에너지는 절약합시다'

오지은- 인생론 중

또한 내향성과 외향성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다. 모두가 내향·외향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을 오간다. 내향성이 강한 나도 필요에 따라 감춰져 있던 외향성을 어김없이 발휘할 때가 있다. 친해지고 싶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뚜렷한 목표가 있을 때,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때 '선택적 인싸'가 되는 길을 택했다.

내향성은 바꿔야 하는 단점이 아니다. 같은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향적인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자신의 내면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통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다. 창의적인 발상은 고독의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유럽 사회는 개인에게 홀로 고독할 시간을 허했으면 좋겠다. 세상을 바꾸는 고요하고 섬세한 힘 역시 찬양받는 날이 오기를, 용기 내 부드럽게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개인이 타고난 자질을 숨길 필요 없고, 그 특성이 조화될 때 사회는 풍요로워진다. 다양한 존재를 인정할 때야 진정한 톨레랑스에 가까워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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