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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Aug 25. 2020

감자전으로 나뉘는 스위스 문화권

다중 언어 국가의 정체성

제네바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의 프리부르로 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무리가 옆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불어가 들려오기에 '맞아, 여기도 불어권이었지'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주 앉은 친구는 독어로 답했고 나머지 한 명은 불어와 독어를 섞어 말했다. 세 사람은 두 언어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문장마다 언어를 전환하는가 하면 때로는 한 문장 안에서도 단어를 뒤섞어 말하는 게 아닌가.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지만, 결국엔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재밌고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알고 보니 프리부르는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의 경계에 있어, 현지인 대부분이 완벽한 이중 언어 화자라고 한다.



다중 언어 국가 스위스


© 위키피디아


스위스는 다중 언어 국가로, 독일어를 제1 언어로 하는 인구가 64%, 프랑스어 23%, 이탈리어 8%, 로망슈어 1% 미만으로 구성되어있다(2018년 기준). 스위스 인구는 약 8백 5십만 명으로 서울 인구에도 못 미치는데, 이 작은 나라의 공용어가 네 개나 되는 것이다. 이는 다민족으로 이뤄진 국가라 이웃 국가언어를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사용 언어에 따른 문화 차이, 감자전으로 나뉘다



© Laurent Flütsch | Musée romain de Lausanne-Vidy


'뢰스티 국경(독:Röstigraben / 불:barrière de Rösti)'이라는 표현이 있다. 스위스의 척박한 산악 지형에서 비교적 쉽게 자라는 감자로 만든 전이 바로 뢰스티(rösti)다. 뢰스티 국경은 스위스 독일어권과 불어권의 문화 정치적 차이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스위스 전역에서 이 감자전이 소비되지만, 전통적으로는 스위스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표현의 기원은 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 불어권에서는 프랑스 연합군을 지지했고, 독어권에서는 독일의 편을 들었다. 이러한 차이를 가리켜 '뢰스티 국경'이라고 이름 붙였다.

불어권 사람들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하며, 독일어권 사람들은 진지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선입견이 있다. 이러한 선입견은 투표 결과를 통해 확인되기도 한다. 1992년 유럽경제지역(EEA) 가입을 반대한 스위스 시민 50.3 % 중 대부분은 독어권 출신이었다. 또한 이민법, 사회보장법 관련 투표에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내비친다. 도시 간 교류가 확대되며 언어권에 따른 차이가 희미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다중 언어 국가의 정체성

'단일 민족, 단일 언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자란 나로서는, 스위스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권에 따른 문화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  


스위스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강제 합병으로 형성된 주변 국가와는 달리, 지역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연방에 가입하는 협약을 통해 세워졌다. 주변 강대국에 대항하려는 칸톤(주)들이 모여 만든 작은 나라로서 다중 언어 정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다언어 사용은 결속을 약하게 하고 국가 내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늘날 스위스는 다중 언어 국가의 성공적인 모델로 꼽힌다.


그 이유는 언어에서 비롯되는 민족 정체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위스 독일어 사용자라고 해서 스스로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끼지 않는다. 스위스 독일어권의 경우 독자적인 지방어를 발전시켰다. 비교적 독일과 인접한 취리히에 사는 사람의 독일어도 표준 독일어만 배운 사람이라면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언어에서 민족 정체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 오히려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다양성을 국가 정신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자발적으로 연방에 가입한 칸톤의 다양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각 칸톤은 자유롭게 공용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언어의 자유를 보장하고 소수의 언어를 보호하는 정책을 통해, 네 개의 언어 공동체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제품 설명서를 읽으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가 차례로 적혀있다. 베른에서 텔레비전을 틀면 독일어가, 제네바에서는 프랑스어가 흘러나온다. 이런 환경에서 시민들은 어릴 때부터 차이를 배척하지 않는 법을 교육받는다.

제품 설명은 세 개 언어로 병기


'스위스의 국가 정체성은 ~에서 비롯된다'라고 결론짓기엔 역부족이다. 이 흥미로운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아직 식견과 통찰력이 부족함을 느낀다. 분명한 것은 연방마다 각기 다른 정책을 채택하고,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언어가 바뀌는 나라에 사는 국민의 국가 정체성은 나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스위스인들은 모두 스위스인임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식민 지배의 기억이 없어 타국가에 대한 반감이나 극단적인 민족주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가가 주는 혜택을 누리고 직접 정치에 참여하며 서서히 자긍심을 축적한다.  


스위스는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지 않는 힘을 동력으로 삼아 발전해온 나라가 아닌가 싶다. 한 나라 내부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다면,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상대적으로 쉽게 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은 평화와 통합의 필요조건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는 유일한 나라와 반 세기가 넘도록 척을 지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

https://www.swissinfo.ch/fre/germanophones-vs--francophones_la--barri%C3%A8re-de-roestis---un-foss%C3%A9-qui-relie-les-helv%C3%A8tes/41174052

https://www.rts.ch/decouverte/monde-et-societe/philosophie/la-question-philo-du-mois/6764213-questce-que-le-rostigrab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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