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둘러싼 여자들의 대화가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고 있다. 남녀 분반, 여대 학사부터 석사까지 행복 코스를 밟으며, 늘 여초 사회에 속해왔기 때문이다. 외모가 최대 관심사였던 시절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꽤나 가혹한 평가를 하곤 했다. 누구 하나가 '살이 쪘다'라는 말을 꺼내면, 나도 숨겨뒀던 약점을 하나 꺼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동질감을 표하는 것이 관계를 끈끈하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해로운 말들이었다.
A '나 살쪘어.'
B '야, 나도 장난 아니게 쪘어. 이 배 좀 봐'
C '너 정도면 괜찮지. 난 볼륨이 없잖아'
세 사람 모두 결국엔 찝찝한 마음으로 끝내는 대화였다. 말을 꺼내는 사람일 때도, 듣는 사람이 되었을 때도 곱씹게 됐다. 나는 괜찮은지, 친구의 말이 사실인지 거울을 한 번 더 보는 것이었다.
오랜 경험의 축적으로 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영양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속 깊고 영특한 나의 주변 여자들은 암묵적으로 겉모습을 깎아내리는 일을 피했다. 대신 새로운 옷,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을 매의 눈으로 포착해냈다. 현란한 형용사를 동원해 호들갑을 떨며, 서로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들어본 적 없는 구체적인 칭찬으로 기분을 들뜨게 하는 건 언제나 여자들이었다. 나를 둘러싼 또래 여자들의 애정으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것이다.
문제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낯선 방식의 표현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관심을 표현하는 말이란 걸 알지만, 느끼는 바는 마찬가지였다.
'어머, 왜 거기 여드름이 났어요?'
- 나도 왜 생뚱맞게 코 옆에 뾰루지가 나는지 알고 있다면, 미리 조치를 취해서 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얼굴이 왜 그래요? 입술이라도 발라봐요'
- 이미 최선을 다한 풀메이크업 상태였다.
무례함과 관심의 경계를 오가는 말이 지겨워질 때쯤 단호하게 말했다. 외모에 대한 지적을 말아 달라고.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기까진 주저하는 시간이 있었다. 사이가 좋았기에 뒷일이 두려웠다. 다행히도 바로 사과를 해왔고, 서로가 더 조심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내 앞에서 '앗,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하며 하려던 말을 주워 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모두에게 프로 불편러로 각인된 것이 민망했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칭찬도 독이 될까?
공항에서의 일이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던 한 남자 친구에게 직원이 멋진 몸매를 가졌다고 했다. 친구는 좋아라 하며 실실 웃었고 그 천하태평한 모습에 질투가 날 정도였다.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우선 모르는 사람에게 외모를 품평당했다는 점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 말의 진의를 의심했겠지.
칭찬을 칭찬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엄청난 특권이라는 걸 친구는 알았을까?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워야 하는 압박을 느껴본 적이 없기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에 대한 역사가 나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몸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이는 성별에 따른 신체 만족도 연구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여성은 자기 몸을 부위별로 나눠 세세히 평가하는 데에 반해 남성은 신체적 능력에 집중해 답한다고 한다.
예쁘다는 말은 무조건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칭찬만 듣고 자란 소녀는 자신의 가치가 외적인 미에 한정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기 대상화를 강화하며 에너지를 쏟게 된다. 자신의 외모에 가장 끈질긴 감시자가 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있을까? 더는 긍정적인 평가를 듣지 못하는 날이 오면 소녀는 이내 불안해하고,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나도 같은 길을 거쳐온 소녀 중 하나였다. 어딜 가든 예쁘장하단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미취학 아동일 때의 일이었다. (그렇다, 이십 년도 훨씬 더 된 일이다. 이후 친척들은 영구치가 나며 내 미모가 죽었다는 적나라한 평가를 해댔다.) 그리고 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지 않으면 꼭 들어야 할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사춘기가 지날 때까지도 늘 누군가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커다란 거울을 손에 달고 사는 심각한 공주병을 앓기도 했다. 치유가 불가능할 것 같던 이 병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나아갔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내게 외모 칭찬은 독이었다.
외모 강박과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 나는 아직도 헤맨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겉모습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날이 올까? 어쩌면 이 도전은 필연적인 실패로 끝날 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을 좇는 건 본능인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까지 말아야 한다고? 더군다나 나는 그런 칭찬을 듣는 걸 즐거워하지 않는가. 내 머리색과 새로 산 옷이 얼마나 찰떡처럼 어울리는지를 말해주는 애정 어린 찬사는 언제나 날 설레게 했다. 사랑스러운 주변인에게도 내가 느꼈던 설렘을 안겨 주고 싶은데... 좋은 의도로 꺼낸 말이 듣는 사람에게 덫이 될까 망설인다.
최소한의 것은 지키려 한다. 부정적인 외모 평가가 오가면 대꾸를 않거나, 곧바로 대화의 주제를 전환한다. 칭찬도 삼가야 하는 순간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온전히 일에 집중해야 할 때 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넌 예쁘니까 괜찮아' 등 외모가 전부라는 식의 말을 더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
러네이 엥겔른의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는 남에게 보이는 몸보다 기능하는 몸에 집중하라고 한다. 내 몸은 관상용이 아닌, 움직이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문장 완성하기 과제로 글을 마무리한다.
나는 (글쓰고 요리하기 위해) 내 팔을 쓴다.
나는 내 다리로 (몇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다.
나는 내 몸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다.
나는 내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껴안아줄 수 있어서) 좋다.
'말에는 무게와 의미가 있다. 말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 외모 강박적인 문화를 향해 폭탄을 던지자. 당신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빛을 발하게 하자. 당신의 말을 통해 여성을 대상이 아닌, 세계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능력 있는 인간으로 보는 문화의 흐름을 만들자' 272 p
'우리는 외모에 관심을 덜 갖되, 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 몸에 대한 다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건강은 좋아지고 외모 강박은 줄어들어야 한다. 기능의 관점에서 몸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치유해주며 우리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신체 혐오와 신체 불만에 맞서 싸워준다. 또한 몸을 돌보는 데 외모 외에 더 많은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29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