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보다 손끝에 힘이 실릴 때가 있다. 질문에 답을 요하거나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순간, 입에 빗장이 걸린다. 동시에 머릿속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 말부터 시작할까?' 두뇌회로가 빠르게 흐른다. 입안에 왕사탕 하나 머금은 마냥 순조로운 대화의 맥이 끊긴다. 심장이 요동치고 식은땀이 흐른다. 말하기는 참으로 곤혹스럽다.
한때 '제가 하겠습니다.' 당차게 손을 들고 거리낌 없이 발표하던 때도 있었다. 흐르는 유수처럼 말을 술술 해서라기보다 아는 것을 설명하는 그 자체가 기꺼웠다. 생각을 드러내는 일을 곤란하다 여기지 않았다. 대화를 매끄럽게 유도하는 사람이라 믿고 살았다.
결혼하고 남편의 근무지역에 터를 잡아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아는 이가 없어 친구를 사귀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유일한 말상대인 남편은 늘 퇴근이 늦어 부재중이었고, 나는 '어른'사람과의 대화에 갈급했다. 하루 종일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얼굴을 내미는 남편을 앉혀놓고 속사포처럼 일과를 쏟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결같이 들어주던 남편이 되레 하소연했다.
"여보, 나 이제 퇴근했잖아. 좀 쉬었다 말하면 안 될까?"
"당신은 말이 너무 빨라. 나는 들을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혼자 계속 말하고 있어."
"결론만 말해주면 좋겠어. 설명이 왜 이리 길어?"
일순간 민망함과 무안함이 동시에 밀려와 말할 맛이 사그라들었다. 속사포에 횡설수설. 기승전결이 뒤바뀐, 삼천포로 빠지는 말의 여정. 몇 년 새 말습관이 그렇게 물들어있었나 보다. 그럼에도 꿋꿋이 들어주던 남편은 더는 안 되겠는지 듣고 있던 도중에 제동을 건 것이다. 대화가 아닌 일장 연설은 그렇게 끝났다. 하고 싶은 말과 꼭 해야 할 말들이 뒤엉켜 출구를 잃고 입속에만 맴돌았다.
어느 틈에 조리 있게 말하고픈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명료한 말하기 경로가 궁금했다. 스피치 강좌를 통해 터득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만의 비법을 고안하고 싶었다. 고심 끝에 글을 쓰기로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한 글자씩 꾹꾹 진심을 담은 글쓰기. 정제 과정을 거친 글에 마침표를 찍는다. 주어진 시간은 충분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기 전에 내용을 기술하고 훑어보기. 간략하게 정리한 후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음미하듯 말하기. 노트 위에 온전히 담고 나면 생각이 정화되고 그날의 감정, 온도, 느낌을 꺼내볼 수 있겠지.
'글쓰기는 나쁜 언어를 좋은 언어로 바꿀 가능성을 대변한다.' 은유 작가의 책 『쓰기의 말들』에 나오는 문장이다. 비록 말하기는 서툴지만 쓰는 연습을 통해 자신감이 쌓이기를. 오늘도 한 편, 내일도 한 편. 계속해서 펜을 들고 노트 위를 걸어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