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viewerX 토드
‘시체관극’이라는 말이 있다. 공연장에서는 공연의 진행과 다른 관객의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죽은 듯이 공연을 관람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평균 100~180분에 육박하는 공연 시간 동안 한 자리에 꼼작 않고 붙박여 있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비좁은 의자에 숨죽이고 앉아 있다가 온몸이 뻐근해진 채로 극장을 나서며 왜 이런 고문을 자처하고 있나 한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체가 되어가던 내게 <록키호러쇼>의 재연 소식은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 <록키호러쇼>가 너희를 해방하리라! 객석의 시체들을 일으켜 세울 컬트 뮤지컬의 재림! 제작사도 관객의 참여를 적극 장려하며 ‘관객이 공연을 완성한다’는 점을 무엇보다 홍보의 중심에 놓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누구보다 이 공연을 고대했던 나인데, 왜 공연장에서 내 엉덩이는 반쯤 들리다 말아버렸는가 말이다.
<록키호러쇼>가 낳은 신화
<록키호러쇼>를 이야기하면 이 작품이 만들어낸 대단한 신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73년 영국 소극장에서 초연한 뮤지컬이 마니아의 지지 속에 영화화되고, 혹평 속에 개봉 2주 만에 막을 내렸다가 심야극장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일화는 유명하다. 대중과 평단에게 외면받은 작품이 오롯이 소수 관객의 열광적인 숭배로 재조명받은 것이다. 관객들은 대체 이 작품의 무엇에 매료되었을까?
뮤지컬 <록키호러쇼>는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체를 창조하는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을 외계인 과학자 프랑큰 퍼터가 자신의 이상형 록키를 창조하는 이야기로 패러디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여러 인간의 시체를 짜깁기해 만들어졌듯, <록키호러쇼>는 1940~70년대 B급 SF 호러 영화와 록 문화, 금기시된 성적 판타지를 마구 짜깁기한 혼종이다. 오프닝 넘버인 ‘사이언스 픽션 더블 피쳐’부터 한때 극장가에서 A급 영화와 동시 상영되었던 끼워 팔기용 B급 SF 영화에 바치는 찬가다. 또한 공연 전반에 걸쳐 <드라큘라>(외계인들은 자신을 트랜실배니안이라고 소개하며, 프랑큰 퍼터는 드라큘라 망토를 걸치고 등장한다), <킹콩>(록키는 프랑큰 퍼터가 죽자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고, 죽은 프랑큰 퍼터를 안고 탑을 기어오르다 자신도 죽는다) 등 여러 장르 영화 속 아이콘이 코믹하게 패러디된다. 음악과 패션에서는 록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주인공 프랑큰 퍼터는 글램 록과 섹스의 화신. 망사 스타킹과 코르셋을 걸친 프랑큰 퍼터는 남자 혹은 여자라는 이분법적 성 정체성을 벗어난 캐릭터다. 사랑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누며 방문자인 브래드와 자넷 커플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결혼관과 성적 금기에 도전한다.
이처럼 다양한 하위 문화 요소가 논리적 맥락 없이 중구난방으로 섞여 전개되는 뮤지컬 <록키호러쇼>는 언뜻 봐서는 ‘아무말 대잔치’나 다름없다. 재미있는 건 이 아무말 대잔치가 관객에게 완벽한 내러티브에서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해방감을 선사했다는 것이다. 주류 문화에 맞서는 이 외계 혼종은 하위문화에 동조하는 젊은 관객을 사로잡았고, 구멍이 숭숭 난 허술하고 황당한 이야기는 관객이 공연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참견하고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었다. 영화는 이러한 관객의 자유를 더욱 극대화시켰다. <록키 호러 픽쳐 쇼> 심야 상영 당시, 극장에 모인 관객들은 영화 속 장면을 흉내내고 대사를 맞받아치는 전복적인 관람 문화를 만들어내며, 이 영화를 컬트의 효시로 군림하게 했다. <록키 호러 쇼>의 신화는 주류문화에 맞서 하위문화가 승리한 신화이고, 보여주는 무대와 묵묵히 받아들이는 관객의 관계를 뒤집은 신화이다.
프로덕션이 이끄는 관객 참여?
뮤지컬 <록키호러쇼>를 9년 만에 대형 라이선스로 올리면서 제작사는 신화적 위치에 있는 영화 <록키 호러 픽쳐 쇼>의 향수를 자극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영화관 안내원 역할의 배우가 ‘사이언스 픽쳐 더블 피쳐’를 부르는 동안 거대한 스크린으로 제작진 크레딧이 흘러가게 한 오프닝과 엔딩 장면은, 해당 장면의 배경이 영화관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 <록키 호러 픽쳐 쇼>를 연상시킨다. 오프닝 넘버 뒤에 이어지는 결혼식 장면에서 프랑큰 퍼터와 리프라프가 교회 직원으로 등장하는 연출 역시 영화와 비슷하다.
무엇보다 심야 상영에서 성행했으며 이제는 해외 공연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관객 퍼포먼스 ‘콜 백’을 국내 극장으로 도입하려 한 시도가 돋보인다. 여기에는 ‘시체관극’에 익숙한 소극적인 관객을 어떻게 참여시킬 것이냐는 숙제가 따라온다. 영미권에서의 위상이 어떠했든 우리나라 관객에게 <록키 호러 쇼>는 잘 공연되지 않는 낯선 작품이다. 영미권 관객들이 만든 ‘관객용 대본’ 역시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끼어들어야 배우와 관객이 적당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지, 오랜 경험과 암묵적 합의로 쌓인 규칙을 한국 관객은 모른다. 그래서 기존에 마니아 관객이 자처했던 초심자 ‘버진’을 교육하는 역할을 여기서는 제작사와 홍보대행사가 떠안았다. 공연 전 로비에서는 콜 백을 하는 방법이 적힌 신문을 나눠 주고, 콜 백에 필요한 준비물을 MD로 판매한다. 무대 영상으로도 ‘타임 워프’ 춤을 추는 방법을 알려주며 참여 유도에 열심이다.
그러다 보니 묘한 양상이 벌어졌다. 관객은 가만히 앉아서 프로덕션이 보여주는 공연을 관람해야 한다는 규칙을 깨는 것이 콜 백의 묘미인데, 오히려 프로덕션이 나서서 주춤거리는 관객을 끌고 가는 아이러니한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공연 도중 참여를 망설이는 관객을 이끄는 것 역시 배우들이다. 앙상블 ‘팬텀’은 객석과 무대를 오가며 언제 손전등을 들어야 할지, 언제 빵을 던져야 할지 몸짓으로 친절하게 알려준다. ‘타임 워프’ 춤을 추기 전에는 배우가 먼저 관객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선동한다. 눈치만 보던 관객은 그제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실제로 배우들의 이런 친절한 신호와 사전 설명이 부족했던 고무장갑 콜 백의 경우, MD로 고무장갑을 판매하고 있음에도 참여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관객이 주체적으로 나섰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일탈적 재미는 반감된다. 프로덕션의 뜻에 따라 온순하게 길들여진, 그들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자유로운 관객이 된 것 같아 참여를 하고도 해방감보다는 찜찜함이 남는다.
세련되고 안전한 외계인
일각에서는 ‘아직 관객 로딩이 덜 됐다’고도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관객들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그런 장밋빛 미래는 요원해 보인다. 일단 대극장 공연이 주는 무대와의 거리감이 만만치 않다. 심리적으로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멀다. 무대 위로 빵을 던질 수 있고, 팬텀이 뿌리는 비를 신문지로 막는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건 앞자리에 앉은 소수 관객뿐이다. 관객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나섰을 때 배우가 무리 없이 소통하며 공연을 진행하려면, 아무래도 대극장이라는 큰 규모는 장애 요소가 된다.
공연 자체가 세련되고 안전해진 것도 관객들을 소극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군더더기 없는 철제 구조물에 오색 조명이 번쩍이는 프랑켄슈타인 성은 고풍스러운 고딕 호러 장르의 성보다는 SF 영화 속 우주선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배우들의 분장과 의상은 그로테스크하기보다는 스타일리시하며, 김성수 음악감독이 다듬은 음악 역시 한층 시원스럽다. 이러한 세련됨은 <록키호러쇼>라는 이상야릇한 뮤지컬을 한층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어주지만, B급 특유의 매력을 감소시키기도 한다. 관객이 끼어들 수 있을 만큼 살짝 만만해 보이는 투박함, 느슨함이 이 공연에는 별로 없다.
19금 뮤지컬이지만 15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표현 수위가 건전한 것도 아쉬움이다. 가장 농염한 카리스마를 뽐내야 할 프랑큰 퍼터에게서 왜 ‘섹슈얼 텐션’이 느껴지지 않는지, 자넷과 브래드는 가릴 데 다 가린 속옷을 입고 대체 뭘 부끄러워하는지, 자넷이 가식을 벗어던지고 섹스에 탐닉하는 에로틱한 넘버 ‘터치 미’에서 왜 건강미 넘치는 아크로바틱 체조를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의아함의 연속이다. 동성애, 드래그퀸을 다룬 뮤지컬이 넘쳐나는 지금의 한국 뮤지컬계에서 <록키호러쇼>가 던지는 충격이 예전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말의 성적 해방감은 안겨줘야 하는 게 아닌가.
제작사는 이 작품을 ‘컬트 뮤지컬’이라는 수식어로 홍보한다. ‘컬트(Cult)'란 종교적인 숭배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소수의 열광적인 팬을 지닌 작품을 지칭할 때 쓰이는 용어다. 때문에 원론적으로 컬트라는 장르는 존재하지 않는다. 컬트는 장르가 아닌 현상이다. 컬트 뮤지컬이 되느냐 마느냐는 관객이 결정한다. 적당히 대중적이고 적당히 안전한 길을 택한 <록키호러쇼>가 마니아를 열광시키는 컬트 뮤지컬이 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게 제작사가 나서서 관객에게 빵과 신문을 쥐어준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