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뷰어X Mar 15. 2018

청춘의 불안까지 탐내지 마세요, 뮤지컬 <틱틱붐>

by reviewerX  클레어

뮤지컬 <틱틱붐>은 조나단 라슨의 유작이다. <렌트>의 작곡가이기도 한 조나단 라슨은 <렌트>의 개막 하루 전날 대동맥 파열로 사망했다. 10년 동안 웨이터를 하면서 뮤지컬 창작을 꿈꾸던 이 젊은 천재는 자신의 성공을 영원히 보지 못한 채 그 나이에 박제되었다. 그의 죽음 후 <렌트>는 대 성공했고, 그 성공에 힘입어 조나단 라슨이 만들어 두었던 자서전 격의 1인극 <틱틱붐>은 3인극으로 정비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틱틱붐>은 웨이터를 하며 뮤지컬 작곡가를 꿈꾸는 존이 워크숍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겪는 불안과 고민을 보여준다. <틱틱붐>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슈퍼비아는 실제로 조나단 라슨이 만들었던 작품으로, <틱틱붐>은 조나단 라슨 본인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틱틱붐>의 서사는 긴장감이 있거나 치밀하지 않다. 그저 고민하는 청춘의 흘러가는 일주일을 속도감 없이 보여줄 뿐이다. 인상적인 사건이나 반전도 없고 갈등은 소소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지 한 개인의 지루한 일상 나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조나단 라슨의 비극적 생애 때문에 작품은 바깥 고리로 확장되어 읽힌다. 조나단 라슨의 전사를 아는 이들은 무대 위 존의 모습에서 요절한 젊은 예술가를 겹쳐본다. 이는 작품이 의도하지 않았던 비극성을 유발한다. 설사 작품의 전사를 모르더라도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 대한 고민은 보편적이다. 작품은 청춘의 고민을 나열한 후, 뻔하지만 희망적인 엔딩을 통해 비슷한 처지의 젊은이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여기까지가 기대한 <틱틱붐>이다. 그런데 이번 <틱틱붐>은 전혀 다르게 읽힌다. 작품의 위로는 위로로 다가오지 않는다. 뭐가 문제일까? 작품은 죄가 없다. 다만 작품이 공연되는 지금의 시대상과 이 작품이 공연되는 방식이 문제일 뿐.  



1990년‘도’에 서른 살 vs 1990년‘생’이 서른 살 

<틱틱붐>의 배경은 1990년도, 1990년에 서른 살을 맞은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금은 2017년, 좀 있으면 1990년에 태어난 이들이 서른 살이 된다. 즉, <틱틱붐>은 지금 이 공연을 보는 젊은 관객들의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다.  


1990년,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있던 그 시대와 지금의 환경은 너무도 달라졌다. 달라진 환경 때문에 <틱틱붐>의 고민에 쉽사리 공감하기 어렵다. <틱틱붐>의 주요 갈등 구조는 ‘꿈을 향한 험한 길 vs 직장을 향한 편한 길’의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은 꿈이 아닌 그냥 ‘직장’을 향하는 길조차 험하고 험하다. 지금 세대에는 마이클이 존에게 쉽게 제안하는 일자리, 꿈을 포기하면 바로 손에 잡히는 직장은 판타지에 가깝다. 이러한 지금 세대의 고민을 1990년에 서른 살을 맞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위로하기는 힘들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90년에 서른’이라는 가사가 주는 압박감은 더하다. 90년도에 서른 살을 맞았던 이들은 지금 사회에서 청춘들이 고용주나 면접관으로 만나는 꼰대들의 나이니까. 무대 위에서는 본인이 서른 살임을 주장하는 배우들이 서른의 열정을 노래하는데 관객에게는 자꾸 1990년도에 서른 살이었을 사회의 50대 아저씨가 겹쳐진다.  


1990년도에 서른 살은 무언가를 이뤄내서 성과를 보여야 하는 나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2017년의 서른 살은 무언가를 시작하기만 해도 다행인 나이이다. 시대는 달라졌고 그때와 지금의 서른의 무게는 다르다. 그래서 보편적인 ‘청춘의 꿈’을 노래하는데도 공감이 어렵다. 최소한 1990년도라는 단어라도 바꿨다면 어땠을까. 

 


그들만의 20주년 기념 공연 

이런 이질감, 분명 그들이 청춘의 불안을 위로하는데 위로되지 않는 느낌은 작품의 밖에서도 동일하다. 애초에 이번 <틱틱붐>은 이석준-이건명-배해선 세 배우의 20주년 기념 공연이다. 무대에서 20주년 기념 공연을 할 수 있다니! 그 시간을 무대에서 버틴 이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노력했는지는 알지만, 20주년 기념을 파티가 아니라 공연의 형태로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득권의 표상이다. 29살 때 했던 역할을 지금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 그들은 이제 원하면 청춘의 낭만까지도 살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더 까칠한 점은 세 배우가 직접 기획한 이번 <틱틱붐>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 전부 노개런티라는 점이다. 수익이 생기면 나누겠으나 수익이 없으면 페이가 없단다. 이건 무슨 창조 페이인가. 본인들이야 20주년이라 노개런티여도 의미가 있겠지만 다른 배우와 스태프는 무슨 의의가 있어서 노개런티로 공연에 참여하는 것일까? 자선 공연도 모금 공연도 아닌 성공한 배우 셋의 20주년 기념 파티에 젊은 배우들이 무보수로 동원되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물론, 그들도 동의해서 좋은 뜻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열정페이도 노동자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걸? 이러한 선례를 남긴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서 청춘의 낭만을 좇는 존 역할은 이석준(46세), 이건명(46세) 둘이 맡았고, 존과 반대되는 역할인 꿈을 포기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룬 마이클 역할은 오종혁(34세), 문성일(30세)과 같은 젊은 배우들이 맡았다. 전작에서 아빠-아들 역할이었던 배우들이 서로 친구라고 반말하는 걸 보는 것도 영 꼴사나운데. 아들뻘의 새파랗게 젊은 배우들 앞에서 청춘의 꿈과 불안을 노래하는 성공한 아저씨들이라니.  


그 시대, 자신의 고민을 솔직히 반영하여 작품을 만든 조나단 라슨은 죄가 없다. 그의 음악은 청춘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조나단 라슨은 죽음으로 영원히 청춘에 박제되었기에, 지금의 청춘, 그리고 앞으로의 청춘에게도 언제나 동년배의 위로를 건넬 수 있다. 잘못한 것은, 청춘의 낭만 타령을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지금 사회다. 그리고 켜켜이 먼지 쌓인 자신들의 청춘의 기억을 들고나와서 지금 현재 불안한 청춘들을 들러리로 세우면서, 그들만의 추억을 회상하는 배우들이다. 아재들이여. 청춘의 불안까지 탐내지 마시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뮤지컬이여, 컬트가 돼라! 뮤지컬 <록키 호러 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