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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어X Mar 15. 2018

너무 안일한 영웅 그리기, 뮤지컬 <나폴레옹>

by reviewerX 나타샤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그린 대작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작품에는 어떤 장면들이 들어 있을까? 아마도 어린 시절(이때는 훗날의 성공과 대비시키기 위해 비루하거나 소박한 모습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두각을 나타내는 장면, 승승장구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장면, 기념식이나 축하파티, 사랑과 결혼 그리고 실각이나 비참한 최후.. 이런 장면들이 연결될 거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장면들을 인물의 신분이나 시대상에 맞게 화려한 의상과 무대미술로 표현하고, 속 시원하게 뽑아내는 주인공의 아리아나 합창으로 장면을 마무리하면 관객들은 박수를 보낸다. 우리가 보았던 많은 영웅물들이 이런 공식을 잘 따르고 있다. 



뮤지컬에서 유명한 인물이 자주 다뤄지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영웅의 일화는 대중들에게 이미 친숙하기 때문에 드라마틱하게 한 장면, 한 장면 그려내는 것이 용이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영웅이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사건이나 특징이 있다 해도, 실제로 그 인물이 살아온 전 생애는 대중이 기억하는 한 장면과 다르게 조망할 수 있다. 인물의 생애 안에 중요한 사건을 어떻게 배치하냐에 따라 우리는 역사적 순간과 그 인물에 대해 흥미 있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뮤지컬 <명성왕후>처럼 흔히 예상하는 국모의 모습으로 밋밋하게 인물을 그려낼 수도 있지만 <엘리자벳>처럼 ‘죽음’이라는 상징을 통해 불행한 그녀의 삶의 궤적을 짚어 볼 수 있다. 


혹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을 통해 인물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루면 주목받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허구겠지만 <영웅>에서 안중근에 대한 링링의 연정은 안중근이란 인물을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느끼게 해주고, 연극 <궁리>는 세종과 장영실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를 보여주며 성군의 고뇌를 설득력 있게 그린다. 즉 유명한 인물이어도 그 인물을 보여주는 작가 혹은 제작진의 일관된 관점이 있어야 문화 콘텐츠로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올려진 많은 영웅 뮤지컬들을 보면 썩 만족할만한 결과를 냈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의 영웅물들은 인물에 대한 관점 있는 서사보다는 흔히 알려진 사건이나 있을 법한 장면들을 그냥 나열만 하고 장면의 화려함과 가창력을 뽐내는 아리아 몇 곳으로 덮어 버리니 인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없고 작품으로서 감동도 주기 어렵다. 게다가 갈등으로 겨우 넣는 것이 대부분 사랑이거나 가족 간 갈등인데, 이것도 다루는 수준이 졸렬해서 충분한 감동을 주지 못한다. <태양왕>에 욱여넣은 세 여인과의 연애사는 절대왕정의 대표자인 루이 14세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끝나버린다.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나폴레옹>도 전형적으로 이런 손쉬운 영웅 그리기를 답습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한 복판에 서서 역사의 격동을 일궈낸 인물인데,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에 대한 흥미도, 공감도 일어나지 않고,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재미도 없다. 나폴레옹은 전쟁터에서 전투와 전술에 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인데 뮤지컬에서는 병사들의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는 온정적인 인물 정도로만 소개된다. 지도를 들고 전략을 짜서 보여주는 잠깐의 장면이 있으나 서사의 구체성이 없고 드라마가 없으니 그가 비천한 코르시카섬 출신에서 어떻게 고속승진을 했는지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또한 그는 10년이나 유럽 왕정국가들을 상대로 전쟁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성과와 위상을 드높인 인물이었고 국민들의 자부심이었기에 황제까지 될 수 있었는데 뮤지컬에는 이 부분이 2막에 잠깐 그것도 탈레랑의 전사를 얘기하기 위한 브릿지로 잠깐 등장한다. 더욱이 제작사가 베토벤의 ‘영웅’을 편곡해 오버쳐로 사용했고, 대관식 장면은 다비드의 그림을 재현했다고 특별히 강조하는 것을 보면 뮤지컬 <나폴레옹>은 익히 알려진 다른 명작들에 기대어 영웅을 손쉽게 표현하려 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작품이 아니라 뮤지컬 <나폴레옹>이 그 자체로 무엇을 보여주는 지가 약하기 때문에 다른 기존 명작의 명성에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꼴이다. 


오락성 짙은 뮤지컬 안에 역사적인 평가나 시대상을 꼭 담을 필요는 없다. 그럼 역사적인 색깔을 빼고 다른 것을 다루겠다는 뚜렷한 의지나 그만큼의 설득력은 잘 갖추고 있을까? 제작사는 나폴레옹을 둘러싸고 탈레랑과 조세핀이 치열한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 이야기라고 홍보하였다. 우선, 탈레랑은 작품 전반에 걸친 절대 악인인데 해설가의 역할까지 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도 얘기해 준다. 삼각 구도로 보기엔 조세핀의 역할이 너무 미미하고, 사실은 탈레랑이 과잉 활용되면서 인물구도에 여러 가지 혼란을 준다. 도대체 탈레랑이 나폴레옹을 이용해서 권력을 휘둘렀다는 해설은 반성적 고백인지, 제 3자적 거리 두기인지, 그냥 본인의 욕망에 충실한 얘기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치열한 삼각 구도의 결정판은 조세핀과 이혼하도록 탈레랑이 음모를 꾸미는 부분일 텐데 이 대목은 이야기 만듦새가 섬세하지 못해 치열한 삼각 구도라는 것도 설득력을 잃는다. 조세핀이 바람을 피운 사실이 작품 안에 확실히 나오는데, 도대체 어떤 부분이 탈레랑의 음모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제작사는 이 부분을 공연 중에 수정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니 더욱 할 말을 잃는다.(7/27 공연 분부터 수정된 것이 올라간다고 했지만 그 이후에도 수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치열한 삼각 구도를 표현하면서 이 작품이 던지려고 한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권력을 둘러싼 암투? 아니면 탈레랑의 방해에도 변치 않는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사랑? 이런 권력투쟁 속에서 느끼는 영웅의 갈등? 무엇도 뚜렷하게 이것이라고 손에 확실히 잡히는 것이 없다.



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고, 무엇이 더 좋은 방식인가는 작품의 성격과 주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뮤지컬 <나폴레옹> 제작진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뚜렷하게 해야 하고 그것에 맞춰 전달하는 방식을 정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뮤지컬 <나폴레옹>은 이 역동적인 인물을 설명하면서 정작 뭘 얘기하고 싶은지는 빠져있고, 영웅을 이야기하는 뻔한 클리셰들로만 작품을 채워 놓았다. 얼마나 고민 없고 손쉬운 제작방식인지 모르겠다. 마치 뮤지컬은 반복해서 기억에 남는 넘버 한두개(‘빅토리~ ’로 시작하는 이 넘버의 촌스러움이란...)와 웅장한 음악(<영웅>을 편곡한 오버츄어?)과 멋지고 화려한 장면(대관식?) 정도 있어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마지막 워터루 전투장면을 극의 맨 앞과 맨 끝에 수미상관으로 배치한 것도 역시 이런 혐의를 벗지 못한다. 나폴레옹 이야기니까 워터루 장면 하나쯤은 넣어 주어야 맛이지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첫 장면과 끝 장면인데 이 워터루 전투장면이 작품 전체에서 어떤 의미와 비중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짜여지지 않은 채 삽입되어있기 때문에 이 장면은 감동도, 여운도 주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영웅의 이름만을 앞세워 완성도가 낮은 작품을 올려놓고, 역사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은 부모들의 교육열을 볼모로 가족관객을 끌어들이고, 배우들의 유명세를 등에 업어 수익을 올려보자고 하는 이런 행태는 없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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