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viewerX 카일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 H. Carr)가 말하기를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과거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과거와 다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방대한 시간 속에서 살아남고 선택된 것만 현재와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미 누군가에 의해 각색되고 재단된 부분만을 배우게 된다. 가령, 1945년은 일본제국의 압제에서 해방된 해이고 모든 조선 민족은 두 손 들어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다, 고 배우는 식이다. 일제는 원자폭탄을 맞아도 싼 극악무도한 나라이고 조선은 부단한 독립 의지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난 의지의 민족이라는 공식도 빠지지 않는다. 일본인도 제국주의의 피해자일 수 있다거나 독립은 조선의 자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며 마냥 기쁜 일도 아니었음은 살짝 논외로 한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박열>도 그랬고 연극 <1945>도 그렇고, 뻔한 이분법에서 조금 비켜선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선을 뵌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모든 권력으로부터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려는 뜻을 가진 동지였다면 명숙과 미즈코는 같은 위안소에서 고통받던 삶을 부둥켜안고 살아나온 동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한일의 대립 감정이 이들에게는 없다. 그래서 이들은 자칫 양측 모두에게 적대시된다. 단순한 흑백논리로 이들을 재단하지 않으려면 현미경을 들고 이들이 걸어온 삶의 결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한다. 작가 배삼식은 연극 <1945>를 통해 역사 속에 화석처럼 묻혔던 '사람'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붓질하고 먼지를 털어내어 오늘에 펼쳐 보여준다.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독립의 빈틈
작가는 1945년, 장춘 전재민 구제소 사람들의 삶을 아이들-숙이와 철이의 눈과 입을 통해 객석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택한다.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가 그랬듯이 어린 남매의 천진난만한 시선을 통해 어른들의 이중성과 모순된 현실이 낱낱이 드러난다. 객석 왼쪽에 따로 만들어진 숙이와 철이의 무대는 중앙 무대와 거리를 둠으로써 관찰자로서의 아이들의 역할을 환기한다. 극은 어린아이의 시선이라는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지난한 현실을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너그럽게 보여준다.
어린아이가 작중 화자일 때 관객은 두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먼저 이 극이 실제 사실보다 해학적으로 표현될 것이라는 점이다. 어린아이의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아이의 짧은 어휘로 표현되는 세계는 현실보다 단순하게 재구성되고 희화화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인 학교에 다니고 일본어만 쓰던 숙이와 철이가 해방이 되자 갑자기 조선말을 쓰느라 애먹는 장면이 그렇다. 부모의 욕심과 극성에 따라 아이들은 일본인이 되었다가 조선인이 되었다가 한다. 일본말을 잘 해서 칭찬받던 아이들은 이제 일본말을 쓰다가는 쫓겨날까 봐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독립은 좋은 거라는데, 편안한 집과 장난감을 두고 남쪽으로 떠나기 위해 낯선 사람들과 뒤섞인 구제소에서 살아야 한다. 한편 구제소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떡장사를 하기로 하고 찐 쌀을 발로 밟으며 떡을 만드는 장면은 고생스럽다기보다는 마당놀이의 한 대목처럼 왁자하니 즐겁게 그려진다. 등장인물이 다같이 무대 전면으로 모임으로써 황량하던 무대가 꽉 채워지고 심지어 그들은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해 보인다.
다음은 아이들에 의해 감춰진 비밀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작은 몸집으로 사건의 틈 사이를 쉽게 드나든다. 어른들은 그 앞에서 경계심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조심스럽게 숨겨왔던 비밀이 아이들 앞에서는 부지중에 노출되고 그것이 큰 파장을 불러오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아이들은 대개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 한다. 이 극에서 벙어리 노릇을 하는 미숙이가 숙이와 철이 앞에서는 미즈코가 되어 유코에게 떡을 나눠주는 장면이 그러하다. 또한 숙이와 철이를 통해 작가는 어른들이 놓치고 있는 진실의 한 귀퉁이를 보여준다. 독립이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 이노인이 '해방 값'이라 부르던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 조선사람이라고 다들 착하고 유순하지는 않았다는 것,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는 병자를 내칠 수도 있다는 것‥ 다들 한쪽 눈 질끈 감고 외면하던 진실 말이다.
이런 장치와 장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에서 한발 떨어져서 관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관객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특정 인물에 이입하기보다는 타자로서 극을 관찰하고 사건을 판단하게 된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는 것
명숙과 미즈코는 일본군을 따라 전선을 옮겨 다니며 위안소에서 같이 지낸 위안부였다. 일본의 패망으로 위안소가 해체되었지만 죽은 일본군의 아이를 가진 미즈코는 일본에 다다르기 전에 십중팔구 길에서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누군가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 물건에 불과하다고 자조하던 명숙은 미즈코를 벙어리 동생 미숙이라 속이고 장춘의 구제소로 흘러들어온다. 들키는 날엔 같이 고초를 겪을지도 모르지만 명숙은 미즈코를 일본인이라고 내치지 않는다. 명숙과 미즈코는 구제소 이웃과 공동으로 떡장사를 하면서 환심을 사고 신뢰도 쌓는다. 이제 며칠 후 기차만 타면 되는데 굶주린 일본 아이에게 떡을 나눠주려던 미즈코의 동정심이 화를 부른다. 미즈코가 일본인이라 일본 아이에게 떡을 주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다음 장면에서 장질부사에 걸렸다는 이유로 이웃들에 의해 구제소 밖으로 쫓겨난 장씨에게 제 이불을 갖다 덮어주는 것도 미즈코이다. 명숙과 미즈코에게는 상대방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보다는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인가가 더 중요해 보인다.
결국 미즈코가 일본인임이 밝혀지고 명숙이 거짓말한 이유를 따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세 번 자신을 부인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먼저 미즈코를 숨긴 명숙의 거짓말을 비난하는 이웃들을 보면서 그들의 말에 동의를 하는 순간이다. 원수인 일본인을 숨겨주는 것도 나쁘고 거짓말도 나쁘다는 끝순과 순남의 말이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순간 지금껏 명숙과 미즈코를 지켜봐 온 너그러운 시선이 부인당한다. 그리고 그 이웃을 향해서 이 처녀들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온 흙탕이 더 지저분했을 뿐이라며 이들을 씻어주자고 말하는 영호를 보면서 두 번째 자기 부인을 경험한다. 그렇지, 용서가 인간의 미덕이 아니던가 말이다. 조금 다른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려는 영호의 노력이 기특하다 생각하며 사람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 고개를 주억일 때 관용을 경험한다. 그러나 '당신이 뭔데 우릴 씻어줘? 우린 더럽지 않아. 더러운 건 우릴 보는 당신의 눈이지.'라고 일갈하는 명숙의 목소리에 부끄러움과 함께 세 번째 자기 부인에 이른다. 사람과 사람의 수평적 관계보다 저도 모르게 수직과 위계에 익숙했던 묵은 편견이 여지없이 깨진다. 결국 내가 너보단 낫지 자위하며 숨겨왔던 위선을 깨닫는 순간이다. 짧은 순간 관객은 손가락질하는 이웃 사람들이다가 약자를 감싸 안는 영호이다가 기어이 당당하게 자존감을 획득하는 명숙이 된다. 명숙은 타인이 가져다준 독립이 아닌 스스로 쟁취한 독립에 이른다. 극은 관객에게 부끄러움과 자존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이분법을 넘어서는 일
연극이 하는 일이 사실의 나열이나 정답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면,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고 질문하게 하는 게 연극의 역할이라 할 때 이 연극은 참 좋은 연극이다.
해방, 독립이라는 낱말로 불리던 추상적인 개념들은 명숙과 미즈코, 선녀, 장씨과 끝순의 치열한 생존기를 통해 비로소 구체화된다. 극은 절대선이라 믿는 공동체의 가치가 인간 자체와 부딪칠 때에는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 갈등하게 한다. 딱 둘로 나누려다가 그로 인해 잘려나가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직접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재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명숙과 미즈코에게 사람들이 쌓아 올린 고정관념이라는 담을 넘는 일이 절대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겠으나 기어이 그 담을 넘음으로 그들의 삶은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 된다. 이전에 보아왔던 숱한 작품 중에, 구제소 사람들같이 남을 비난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고 영호처럼 용감하게 약자를 보호하려는 소시민적 영웅도 자주 보았으나 명숙처럼 약자에서 순식간에 강자의 위치로 스스로 성장하는 캐릭터는 본 적이 없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사람은 극적으로 자주 존재하지만 스스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얼마나 되랴. 첨예한 시험의 순간에 '나는 깨끗해!'라고 외치는 명숙은 스스로의 삶에서 한 차원의 도약을 했고 그 도약은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타버릴 수도 있고 정제될 수도 있지만 선택에 따라 결과물은 완전히 달라진다. 명숙은 1945년의 불길을 통과하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고 자조하지만 작가는 명숙과 미즈코가 물건이 아니라 스스로 사람으로 살아나가는 모습을 통해 비록 좁을지언정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늘날의 상황에도 대입해 볼 수 있다. 한일, 남북의 첨예한 관계 같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뿐만 아니라 무한경쟁, 물질 만능, 정보화‥ 등등의 키워드로 대별되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선택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역사의 죄인들에게 쉬 면죄부를 부여하거나 자칫 본질을 흐릴지 모른다는 우려를 모르지 않지만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판단하는 자가 달라질 뿐이다. 오늘은 그저 1945년이라는 배경에 으레 기대하는 뻔한 시대 정서나 민족적 감성에 의존하지 않고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성장하는 인간의 본질에 한 발짝 더 다가가려는 작품의 시도가 반갑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