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viewerX 롤라
두산아트센터는 2009년부터 ‘기획연극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매년 한 가지 주제로 여러 편의 연극을 소개했었고, 2013년부터는 연극에 더해 인문학 강의, 전시 등을 덧붙여 ‘두산인문극장’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두산인문극장은 기존 기획 연극 시리즈의 확장형인 셈이다. 두산아트센터의 기획 공연은 프로그램이 확대되는 등 외면상 변화가 있었으나 하나의 주제 아래 참신한 소재와 독특한 형식의 공연을 선보인다는 점은 예나 지금인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올해 두산인문극장의 첫 번째 연극 <낫심>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작가의 실험 도구로서의 연극
<낫심>은개막 전에는 매회 다른 배우가 출연한다는 소식으로, 개막 후에는 그 독특한 형식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무대는 꽤 단출하다. 책상과 의자, 스탠드 마이크 그리고 스크린이 전부다. 공연이 시작되면 극장 관계자가 유의사항을 알려준다. 배우는 공연 시작과 동시에 대본을 보게 된다는 것과 관객들의 참여-다시 말하면 얼마나 마음을 여느냐-에 따라 작품을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관계자가 그날 공연할 배우를 소개하고 배우가 입장한다. 배우도 보지 못한 대본이 들어있다는 상자가 열리면, 배우도 관객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연극이 시작된다.
<낫심>은 개인적인 이유로 고국 이란이 아닌 독일에 거주하며 영어로 글을 쓰고 타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는 작가 낫심 살리만푸어의 작품으로, 작가의 독특한 이력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과정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것과 같아 보였기에 <낫심>은 작가의 작은 실험 같았다.
대본이 들어있다는 상자 속에는 ‘스크린을 보라’는 메시지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달랑 들어있고, 이내 공연해야 할 대본이 무대 뒤 스크린에 나타난다. A4 용지 한 장에 대사 한 줄 혹은 지문 한 줄이 적혀 있는 대본은 작가 낫심 살리만푸어가 친절히 넘겨준다. 그것도 작품 진행 속도에 맞춰 실시간으로 말이다. 배우가 대본대로 말하고 지문대로 행동하는 동안, 관객도 동시에 대본과 지문을 읽을 수 있다. 실시간으로 나타난 대본을 소화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연기력보다 순발력이나 눈치가더 필요한데, 그렇다고 해서 배우의 순발력이나 눈치가 작품의 재미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는 순간, 화면 속에서 대본을 넘기던 작가의 손이나 대본을 같이 공유하는 관객들이 나서서 배우를 돕기 때문이다. 작가, 관객 그리고 배우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극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즉석에서 대본을 보며 연기를 해야 하는 까닭에 <낫심>은 즉흥극 같기도 하고, 관객은 어떤 식으로든 작품 혹은 배우와‘소통’해야 하므로 관객 참여형 연극 같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기존 연극과 꽤 다른 양상을 띠는 <낫심>은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낯섦은 아주 새로운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그렇기 때문에 평소 굳이 인지할 필요가 없던 연극의 특징을 겉으로 과감하게 드러내는 방식에서 기인한다.
극장 안에 사람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감정의 교류와 소통을 통해 매회 다른 공연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연극의 매력인데, <낫심>은 이런 연극의 매력을 좀 더 심화시켰다. 공연 시작과 동시에 대본을 공개하는 방식은 배우와 관객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배우나 관객의 구분 없이 모두 함께 직면한 낯선 상황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의 이유가 된다. 실제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본에 따라서든 아니면 관객의 갑작스러운 필요에 따라서든 빈번하게 배우와 관객, 관객과 관객이 소통한다. 그래서 미리 짜인 틀 안에서 공연되는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관객에게는 한발 물러서 극을 관망하는 것이 아닌 극의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극을 경험하게 한다. 또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은 극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태도에도 영향을 끼친다.
<낫심>이 극장 안에 있는 모두가 소통할 수밖에 없는 판을 만들어낸 까닭은 타인 혹은 낯선 것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소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언어로 우리는 과연 소통할 수있는가
극에는 딱히 이야기가 없다. 작품은 스크린을 통해 작가와 사람들-배우와 관객-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극 진행 방식이 조금 익숙해지면 서로에 대해, 서로의 언어에 대해 조금씩 배워간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언어인 이란어를 소리 내어 말하고, 그 뜻을 알아가는 일련의 행위들이 반복된다. 단순히 단어를 읽고 그 뜻을 아는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가 알려주는 단어는 작가와 연관되어 있기에 작가는 단어에 얽힌 개인적인 이야기도 함께 공유한다. 작가는 극 중반부터는 아예 무대에 등장해서 관객과 직접 마주한다. 작가는 단어와 관련된 물건을 보여주기도 하고,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도 한다.
작가는 계속해서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대답을 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와 사람들은 이렇게 소통한다. 이미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한 걸음 극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부지런히 작가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낯선 언어 속에서 속에 담긴 정서도 읽어내기에 이른다. 처음 사람들이 배우게 되는 이란어는 ‘머먼’이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머먼’이란 소리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지만, 그 뜻이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내 다양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각자가 평소에 ‘엄마’라는말에 대해 갖는 이미지다. 그런데 여기에 작가와 작가 어머니 사이의 사연이 곁들여지면 ‘머먼’은 좀 더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 일련의 과정은 마치 마치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의 곁으로 가 꽃이 되는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체험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극 마지막, 작가는 이란에 있는 어머니에게 직접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자신이 쓴 이야기를 배우의 입을 빌려 이란어로 전한다. 배우가 이란어로 이야기를 읽는 순간, 우리는 한글 번역을 보지 않고도 ‘예크부드, 예키 나부드’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옛날 옛적에’로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배웠던 단어와 문장이 한데 얽혀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 담긴 작가가 어머니에게 전달하고 싶던 말의 간절함과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한 아련함이 물씬 객석으로 흘러온다. 배우의 읽기가 끝나면 작가는 핸드폰을 전달받아 ‘머먼’으로 시작하는 짧은 말을 어머니에게 전한다. 번역이 되지 않은 그 말의 뜻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것은 작가의 작은 실험이 꽤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낫심>이 흥미로운 작품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운 점이 없던 것은 아니다. 여러모로 실험적인 작품이었음에도, 너무 보편적인 소재로 보편적인 감정을 끌어내는데 그친 것이 가장 아쉽다. ‘어머니’가 주는 보편적인 감정은 굳이 이런 실험이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관객에게도 쉽게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단어지 않은가. ‘머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작가의 의도가 파악되는 순간 극에 대한 호기심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어차피 실험이라면 좀 더 과감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낫심>은 올해 두산인문극장 ‘이타주의자’의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경계 허물기’라는 주제에 더 어울리는 같았다. 하지만 <낫심>의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였으니 이타주의자의첫 연극으로도 나쁘지 않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낫심>은 접하기 힘든 경험을 선사해준 연극으로 고마움과 즐거움이 컸으니, 그것만으로도 두산인문극장을 여는 첫 작품으로 손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