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viewerX롤라
구 선생님, 제 마음은 어디서 치료받나요? 뮤지컬 <구내과병원>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요즘 공연 중인 혹은 공연 예정인 창작 뮤지컬 목록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여기에 라이선스 뮤지컬까지 합치고 나면 도대체 이 많은 뮤지컬은 어디서 만들어내는 것일까 하는 단순한 궁금증부터 다들 장사는 되는 것일까 하는 공연한 걱정까지 생긴다. 재미있는 건 현재 공연 중인 작품이 그렇게 많은데 또 그만큼 소재나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도 있는데 그렇게 각자의 개성이 강한 작품을 보고 나와도 감상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뮤지컬 <구내과병원>은 창작 뮤지컬의 춘추전국 시대, 창작 뮤지컬의 홍수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지금, 대학로에 입성했다. <구내과병원>은 제목에서부터 왠지 모르게 요즘 창작 뮤지컬과의 차별성이 느껴지는데, 이런 차별성은 제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재까지 이어진다. 작품은 ‘영혼을 치유하는 병원’에서 벌어지는 그리는 판타지 드라마다. 따지고 보면 산 자와 죽은 자가 교감하는 판타지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술가와 살인마, 치정과 살인이 대세처럼 느껴지는 창작 뮤지컬 판에서 <구내과병원>의 등장은 좀 신선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더해 이 작품은 ‘죽음’을 가볍고 유쾌하게 그린다. 죽음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 역시 아주 생소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익숙한 것을 낯설게 봄으로써 생겨나는 뜻밖의 웃음이나 감동을 기대할 수 있으니 그 출발은 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가지 더, 작품의 배경이 90년대 재개발이 한창인 서울 광희동인 것도 특이하다. 시공간적 배경이 작품 속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추억 팔이 식 감동이나 재미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지만 작품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촌스러움을 ‘정겨움’이라는 정서로 치환하는데 한몫한다. 아기자기한 소품이 복잡하지만 정갈하게 정리되어있는 무대, 종종 왠지 모르게 90년대 댄스 음악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음악, 의도적인지 알 수 없지만 요즘 뮤지컬에서는 보기 힘든 촌스럽게 느껴지는 안무나 연출이 ‘촌스럽지만 정감 있는’ 분위기를 꽤 일관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구내과병원>을 보다 보면 <김종욱 찾기>나 <오! 당신이 잠든 사이>처럼 2000년대 중반쯤 초연한 뮤지컬이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의 소재나 분위기로만 보면 <구내과병원>은 분명 지금 공연 중인 많은 창작 뮤지컬과 다른 차별점이 있다. 그러나 이 차별점이 장점으로 발전하지는 못하는데, 그 이유는 <구내과병원>이 가장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를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 한데서 찾을 수 있다. 덕분에 극의 구성은 굉장히 성기고 어설픈 구석이 많아졌고, 결과적으로는 작품을 공감과 이해를 방해한다. 한 마디로 겉모습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여기에 <구내과병원>만의 장정이 되어야 할 특별한 세계관은 종잇장만큼 얄팍하기 짝이 없어 불 난 집에 부채질해대는 꼴이 되어버렸다.
주인공도, 이야기도 갈팡질팡
<구내과병원>은 산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내과병원을 기준이 찾아내고 발을 들이고, 일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극은 크게 혼수상태에 빠진 할머니를 둔 의대생 장기준의 이야기, 구내과병원에서 세상과 ‘안녕’을 준비하는 영혼들의 이야기, 그리고 구내과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구지웅의 이야기 등 총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기준은 혼수상태의 할머니를 만날 희망에, 영혼들은 이 세상과 ‘안녕’을 하기 위해 구내과병원에 찾았고, 구 원장은 과거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내과병원을 운영한다. <구내과병원> 속 이야기나 인물이 원하는 바는 꽤 뚜렷하다. 그러나 인물들이 각자의 바람을 이루는 과정은 좋게 말하면 축약되어 있고, 나쁘게 말하면 건성건성 진행되어 인물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공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세 덩어리의 이야기 사이에 분명 연결성은 있지만 유기적이진 않다.
작품을 구성하는 세 가지 이야기 중 중심이 되어야 할 이야기를 꼽자면 구내과병원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준의 이야기일 것이다. 우연히 비밀의 공간에 발을 디딘 기준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변하는, 주인공의 면모를 가장 많이 지녔다. 작품 속에서 기준은 이야기를 전개하고 성장-또는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주인공으로 인식될 만큼 돋보이진 않는다. 내 상식의 선에서는 기준이 분명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작품 안에서 구현된 기준은 낯선 세계인 구내과병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받아내는, 관객을 위한 일종의 작품 속 세계관 가이드 역할이 더 돋보이기 때문이다. 구내과병원에서의 경험은 그를 변하게 하지만, 그 변화의 과정이 뚜렷하지 않으니 결과가 다소 어리둥절하다.
<구내과병원>에서 공을 들이는 건 원장 구지웅이다. 극 초반에는 구 원장에 대한 정보도 없을뿐더러 중간중간 조금씩 언급되는 과거와 죄책감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그것이 못 견디게 궁금한 건 아닌데, 작품은 기꺼이 시간과 공을 들여 구 원장의 과거를 재현해 궁금증을 풀어준다. 내친김에 10년 동안 구 원장을 옭아매고 있던 죄책감도 간단히 해소해준다. 극 초반부터 지속해서 구 원장의 비밀스러운 과거에 대해 호기심을 자극했으니 의문을 해결해주는 건 잘했지만 굳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하다. 이 와중에 정작 궁금한 것, 예를 들면 구 원장은 도대체 어떻게 개원해 영혼을 보고 치료를 하는 것인가는 끝내 풀어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한 애정과 비중으로 구 원장의 이야기를 다루는 바람에 마치 구 원장이 주인공처럼 보이는데, 문제는 <구내과병원>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위해 기묘한 의술을 펼치는 한 의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다. <구내과병원>은 떠나는 사람이 아닌, 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소중한 사람이 세상과 잘 ‘안녕’할 수 있도록 남은 자의 몫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극이다. (그것이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하지만 그러기엔 지금 작품은 남은 자들의 대표 기준과 구 원장의 이야기가 짜임새 있게 다뤄지지 않았고 두 사람이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결정적인 순간도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니, 이 둘의 이야기는 열심히 노오력하면 머리로는 어떻게 이해를 해볼 순 있어도 가슴으로 공감하긴 어렵다.
허술한 세계관, 부실한 이야기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강력하게 밀었던 ‘영혼을 치료하는 병원’의 이야기는 어떨까. 영혼들이 세상과 안녕 하는 과정에서 애초에 기대했던 위로나 감동이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작품에서 영혼들의 이야기는 가장 비중이 작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안녕’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탓이 크다. ‘안녕’은 쉽게 말하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잘 위로해서 저승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작품에서는 구내과병원의 규칙과 안녕에 관해 설명하지만 친절하진 않기에 자꾸만 궁금증이 생긴다. 병원까지 찾아와서 안녕을 하는 사람들은 왜 있는지, 안녕을 못 하면 어떻게 되는지, 구 원장은 어떻게 안녕을 돕는지, 안녕을 할 수 있는 순간은 어떻게 알게 되는지, 왜 가장 소중한 물건을 놓고 가야 안녕이 되는지 등등. 이렇듯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내가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안녕’이 작품 속에서 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의 진행에 상당히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구내과병원>의 ‘안녕’은 충분히 고민되지 못한 채 무대에 올라왔고, 부실한 설정만큼 허술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영혼들의 이야기는 굉장히 축소되어 있고 ‘영혼을 치유하는 병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영혼들이 치료를 받는 과정은 심리 상담 정도로만 표현된다. 그리고 안녕을 통해 얻어지는 보상이나 안녕의 규칙을 어겼을 때 생기는 벌칙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안녕으로 파생되는 질문이 넘쳐나지만 작품은 어느 하나에도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구내과병원>이 ‘떠나 보내는 사람’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영혼들을 안녕을 도와주는 기준과 기웅은 ‘떠나 보내는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과정을 거쳐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들과 진정으로 안녕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갈 수 있다. 그러면 죽은 영혼들이 왜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생기고 안녕을 돕는 기준과 구 원장의 변화도 더 설득력 있게 그려질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구내과병원>의 두 사람에게 깨달음을 줄, 세상과 안녕을 준비하는 영혼들의 이야기는 마치 사족처럼 붙어있다. 영혼들이 작품에서 하는 역할이라고는 이 작품이 ‘영혼을 치유하는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환기하는 것과 중간중간 등장해 소소한 웃음을 짓게 하는 것뿐이다. 근데 내 눈앞에 영혼들이 친부모에 의한 가정폭력이나 (아마도) 군대 내 가혹 행위 등으로 사망한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상한 기분이다.
창작자 여러분, 관객은 궁예가 아니에요
분명 작가의 머릿속에는 완벽한 <구내과병원>의 세계가, 그리고 각 인물의 사연이 하나부터 열까지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어있을 거다. 그 세계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에게는 개떡 같이 이야기를 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을 테지만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가본 사람은 작가밖에 없다. 불행히도 창작 뮤지컬 작가들은 그걸 자꾸만 까먹는 것 같다. 관객들은 극장을 들어서는 순간 매번 작가들이 창조한 새로운 세계를 여행한다.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여행하는 관객에게 적어도 ‘이 세계는 이런 곳’이라고 설명해줄 의무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알 것이라는 착각은 사양한다. 관객은 관객이지 관심법을 터득한 궁예가 아니다.
덧붙여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있다. 작은 부분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창작 뮤지컬을 보면 과연 디테일에 신경을 쓰는 창작진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창작진의 무심함이 느껴진다. 창작 뮤지컬에서 단단한 토대가 되어야 할 ‘설정’은 언제나 구멍 천지다. 장르를 막론하고 창작물의 대부분이 작가의 상상력에서 발현하지만, 그 상상을 실제화하려면 상상보다 더 치열하고 치밀한 설계가 필요하다. 단지 머릿속에서 한 번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는 것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창작자의 빈약한 상상력에만 의지한 이야기의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은 창작 뮤지컬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좋은 작품일수록 더 많은 공이 들어가는 건 당연하다. 많은 창작진이 작품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쏟아내는 열정과 노력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결과물만 놓고 보자면 과연 그 열정과 노력은 어디로 갔을까 싶을 정도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시작은 창대 했으나 그 끝은 미약하게 끝나는 창작 뮤지컬이 얼마나 많은가. 늘 기대를 안고 극장을 들어갔다가 같은 감상을 안고 극장을 나오는 이유다.
이는 비단 <구내과병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정말 많은 창작 뮤지컬이 공연되고 있지만 감상이 그만그만한 것은, 그만그만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갈팡질팡 핵심 핵심 없는 이야기, 궁금한 것은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무대는 공감과 이해를 얻을 수 없다. 공감과 이해가 없이는 작품이 전하는 감동과 재미도 없다. 개연성이니 논리니 하는 것이 필수라는 말은 아니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작품이 구멍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장치나 수많은 이야기 속에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 한 가지를 정하는 결단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다시 한번 말한다. 관객은 궁예가 아니다.
<구내과병원>은 작품 자체가 주는 의미 있는 감동이나 재미는 없다. 대신 순간순간 훅 치고 빠지는 재미있는 대사나 넘버들이 가벼운 웃음을 주고, 굳이 설명이 없어도 상식의 선에서 이해 가능한 감정에 기대 눈물을 자아내는 것에 그친다. 관객들도 적당히 웃고, 적당히 운다. 창작진들은 만족했을까. 나는 작품 속에는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보았지만 발아하지 못한 채 그만그만한 창작 뮤지컬이 되어 못내 아쉬운데. <구내과병원>에는 영혼들을 치료하는 명의가 계신데, 창작 뮤지컬을 보고 답답한 내 마음을 치료해줄 명의는 어디 계시는가. 오늘도 나는 해소되지 않은 질문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