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르네상스의 문학인들 가운데 위대한 지성을 꼽는다면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를 생각한다. 그리고 당대에 남긴 문학적 유산들 중에서도 그들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만큼 우리가 '아직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지혜롭게 제시하는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사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흔히 비교가 되었는데 그들 간의 광기라는 유사성과 동시에 대조되는 기질적 특성 때문이다. 둘 다 미친 척을 했거나 광기에 찬 행동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햄릿의 냉정하고 치밀한 측면과 돈키호테의 직관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를 보인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진정으로 비교되는 쟁점은 광기나 기질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먼저 햄릿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수동적으로 살아내기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죽기이다. 이승에서의 굴욕과 슬픔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은 없으나 한편 죽음에 들었을 때 저승에서 꿀 꿈이 무엇인지, 사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려운 상황, ‘이것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의미다. 여기서 햄릿은 매일을 고통의 숙주가 되어 살아가느니 설령 죽음 이후에 악몽을 꾸게 된다 하더라도 생의 고통과, 인간의 번뇌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보여주며 그 결말에 있을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햄릿은 죽음과 싸운 것이 아니라 삶과 싸웠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보면 영원성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셰익스피어는 시간의 저주를 비웃으며 영원히 남을 가치들에 대해 노래한다. 그런데 햄릿의 독백에서 셰익스피어는 더이상 영원을 확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불가피함을 암묵적으로 언급하며 그 이후의 운명에 대한 불가지론을 펼친다. 햄릿의 비극 속에서 셰익스피어는 실존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어떤 현실도 분명하지 않은 삶의 혼란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셰익스피어는 대답한다. “삶도, 죽음도, 내게 오라, 나는 맞설 것이다.”
그렇다면 돈키호테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돈키호테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매우 쓸쓸하다. 자신의 위대한 이상과 모험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회의하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신이 그에게 베풀어준 ‘자비’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자비는 바로 기사도의 해체이다.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죽음의 두려움과 삶의 고통을 모두 긍정하는 햄릿과 달리 죽음의 두려움과 삶의 고통이 쓰나미가 되어 그 자신이 임종의 순간에 삼켜지는 것과 같다. 돈키호테는 생전에는 분명히 기사도라는 덕(virtue)을 추구했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 정도가 아니라 그의 운명, 혹은 사명이었으며 그의 세계 전부였다. 그러나 기사도의 궁극적 의미는 필멸, 영원하지 않은 것을 경멸하며 천박하다 여기는데 있다. 그는 중세의 영원불멸하는 천상의 가치만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돈키호테도 초인은 아니었는지 죽음을 맞이할 적에는 영원불멸의 기사도와 그의 현실적 운명이 충돌하면서 속세의 연약한 인간으로 돌아와 버렸다.
세르반테스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다. 즉 스토아적인 삶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있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끝까지 긍정하고 죽음을 부정할 것이냐? 아니면 둘 다 긍정하며 삶을 맞서나갈 것이냐? 이들은 모두 후자를 교훈으로 전하고 있다. 이상을 실현하고 싶거든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비극적인 현실이 이상을 상회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맞서나가는 것이 비겁한 인생을 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