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 사토루의 죽음은 결국 어떤 의미였던 것인가? 이성 혹은 인간성을 상징하는 고죠와 동물적 욕망, 혹은 끝을 모르는 잔혹한 야만성을 상징하는 스쿠나의 대립이 마침내 결말을 맞이한 것인가? 어떠한 새로운 사상도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현실의 소강 상태는 만화에서 고죠 사토루가 죽은 이후 '범부' 이하의 등장인물들이 스쿠나와 대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판세가 압도적으로 스쿠나 쪽으로 기울어진 모습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포퓰리즘,신자유주의,전쟁,혐오범죄 등 동물적 욕망이 다시 우세를 잡는 면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비평을 하는 입장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과 함께, 작가조차도 과연 결말을 어떻게 내릴지 정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비록 내가 위대한 사상가라서 이상과 욕망의 긴 역사를 끝내지는 못한다 한들 일단은 범부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의지로 다시 한번 주술회전의 결말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최신화의 상황을 보면 옷코츠 유타가 켄자쿠를 죽이고, 히구루마 히로미가 영역전개를 통해 이타도리 유우지와 스쿠나를 함께 재판장에 세워 스쿠나를 유죄로 몰아가는 모양이다. 히구루마의 식신인 저지맨은 랜덤하게 죄목 하나를 지정하는 특성이 있어, 극단적으로 가벼운 죄로 재판이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했으므로 히구루마는 앞서 진행한 2심에서의 '시부야 대량 학살'과 같은 죄목으로 이타도리에게 3심을 신청하여 확실하게 살인죄를 물게 만든다. 이때 히구루마는 2심 떄 이타도리가 자신이 시부야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는 앞선 진술을 죄책감으로 인한 허위 자백이라고 판결하며 죄는 스쿠나에게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스쿠나가 웃는 것으로 끝나는 마지막 컷으로 보아 이보다 더 논리정연할 수 없는 히구루마의 주장에 허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다. 아니면 심판은 둘째 치더라도 물리적으로 스쿠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결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만일 나는 전자의 경우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해야만 후자의 결말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 그럼 히구루마의 주장에 있어서 위험성은 무엇인가? 바로 행위의 주체이다. 죄책감에 의한 허위자백. 그렇다. 이타도리는 죄책감에 빠져 당시 시부야 학살의 주체를 자신이라고 자백했다. 하지만 이타도리의 주관적 감정이 실제 그의 잘못은 포함하지 않는다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만화 설정상 수육이라는 개념이 주령이 사람의 몸을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스쿠나가 죄인이라는 것이 기술적으로는 명백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만화의 철학적 개념을 살펴보기 위해 우회해서 들어가볼 생각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만을 입고 살아가지 않는다. 복잡하게 연결된 관계들 속에서 타인의 욕망을 자신에 투영하거나, 그들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욕망이 억눌리기도 한다. 사실 오늘날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증폭하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 개인이 갖는 욕망조차도 시대적인 맥락에 의해 축적되어 부풀어오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의 유전자와 자연적 의미의 DNA가 서로 대립하며 혹은 연결되며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나선은 이미 우리 안에 작은 스쿠나와 작은 고죠 사토루가 자리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애초에 나름의 정의를 추구하던 이타도리 유우지에게 순수악의 화신, 스쿠나가 들어간 것도 이에 따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극단적인 욕망이 이질적인 공간, 작은 이성의 공간에 비집고 들어와도 일단 이타도리 유우지에게도 존재하는 무의식적 욕망에 따라 기생하며 자신의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증폭하며 분열하는 암세포처럼.
시부야 사변에서 나나미를 죽인 마히토가 말한 것처럼, 이타도리에게도 존재함은 '마음대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결국 누군가를 구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어떠한 정의도-심지어 그것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자신의 의지나 욕망이 없으면 이뤄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욕망의 방향성보다 주령에게 힘을 주는 것은, 혹은 인간의 야만성에 불을 때우는 것은 그 본연의 양이라는 것이다. 이타도리의 사념 또한 스쿠나의 일부분이거나 그 증폭제라면 죄인은 스쿠나가 아닌 그 사념의 주인인 이타도리로 바뀌는 것이다.
결국 재판은 스쿠나의 편인가? 만일 그렇다면 스쿠나를 이기는 과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물리적인 싸움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도 결말이 난 것은 아니다. 아직 '범부'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번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지금까지의 인류 문명은, 특히나 시대정신은, 천재들, 이성 혹은 인간성의 궁극체에 의해 대표되어 왔으며 이끌어져 왔다. 그러나 자칭 '규격 외 존재', '최강'조차도 스쿠나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러니 저번 글의 물음을 환기하고자 한다. '범부란 무엇인가?'
그 해답은 마히토에게서 얻을 수 있다. 주령을 만들어내는 주령 마히토는 영혼에 그토록 집착했다. 자신의 불완전함, 혹은 자신을 존재자로 만들지 못하는 그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이성과 욕망의 싸움에서 독립된 영역에 속해 있다. 영혼은 이성이나 욕망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힘'에 연연하지 않는다.
'박수는 영혼의 갈채'라는 토도 아오이의 말처럼 영혼은 관계의 매개 혹은 역학인 욕망이나 이성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에 집중한다. 영혼은 타인이 약하든 강하든, 정의롭든, 악하든 간에 그 사람과 함께 상호작용하며 인격적으로 서로를 대하는 '박수'와도 같은 것이다. 손뼉이 맞아야 박수가 완성되듯이, 상대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필연성은 영혼으로 하여금 이성도 욕망도 지닐 수 없는 불멸하는 힘을 준다. 존재하는 방식인 이성과 욕망을 넘어서서 존재 그 자체인 영혼은 그들 중 어떤 것을 택할지 결정할 수 있으며 나아가 배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긴 하지만 이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떄 주태구상도를 통해 형제들의 영혼을 이어받아 각성한 이타도리가 스쿠나를 이긴다던가, 리카와의 관계를 회복한 옷코츠 유타가 스쿠나를 이기거나, 아니면 둘이 힘을 함쳐 이기는 방법이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주술회전의 이상적인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