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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환 Nov 13. 2020

[작은 연못] Kill'em All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올해(2010년)는 ‘육이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신문매체에서는 앞다투어 기획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각 방송사마다 대규모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모든 전쟁들이 그러하듯이 한국전쟁은 아주 특별한 시점에 ‘기어이’ 발생하고만 아주 기이한 전쟁이다. 실질적인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부터, 그리고 전쟁 기간 내내, 그리고 당연히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전쟁의 기원이나 양상에 대해서는 (한동안 브루스 커밍스의 책이 대표하듯) 수많은 학설과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전쟁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사람들과 그 전쟁의 피해자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전쟁의 어두운 일면들이 ‘마침내’ 하나둘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도 그러한 한국전쟁이 남긴 깊은 생채기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우리 앞에 내던져진 진행형의 의문부호인 것이다.


겁쟁이 미군 사병, 한반도에 떨어지다


하도 많이 들어봐서 누구나 다 아는 이 전쟁의 발발은 “평화롭던 한반도. 1950년 6월 25일  세상이 잠든 일요일 새벽 4시. 북괴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삼팔선을 일시에 밀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당시 전황은 속전속결이었다. 김일성이 점심은 서울에서, 저녁은 대구에서 먹을 것이라는 식으로! 전사 자료에 따르면 남침사실은 그날 오후 미국 국무성과 (당시) 육군성에, 그리고, 동경의 극동사령부 맥아더에게 보고되었다. ‘미국입장에서 보자면’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진다. 곧바로 UN안보리 이사회가 소집된다. 일본에서는 항공기가 날아오고 조달 가능한 선박들을 이용하여 한국 내에 있는 미국인들에 대한 소개 작전이 즉각 펼쳐진다. 그리고 곧바로 투입 가능한 미군이 잇달아 한국에 도착한다. 공군, 해군, 지상군 순으로. 어떤 미군이 왔을까.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들이다. 일본 주둔 미군은 대부분 ‘2주간의 군사훈련을 받은, 그래서 총도 제대로 한번 쏘아보지 못한 군인’들이다. 그들은 P.X.에서 1달러를 주고 산 양담배 한 보루를 밖에 내다팔면 10달러를 받을 수 있는 ‘풍요롭고도 평화로운 삶’을 살던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서둘러 한국으로 보내진다. 그들은 삼팔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남한과 북한의 차이도 명확히 이해할지 의문이다. 그들은 폭동진압 수준의 나들이로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전선에 내던져지자마자 엄청난 ‘북한군’의 화력에 놀라고 만다. 그들에게 서둘러 중화기가 보급되지만 낯선 땅, 낯선 상황의 미군은 삼팔선 아래로 아래로 후퇴하며 방어선 구축에 허덕이는 것이다. (전쟁의 양상은 다각적이었겠지만 적어도 노근리 부근에 투입된 미군의 상황은 주로 저러했다.)


노근리 주민, 피난가다


노근리는 충청북도 영동군에 위치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파죽지세의 북한침략군에 의해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한국군과 미군은 죽기 살기로 저항전을 펼친다. 수도권을 내주고 결사항전을 하여야할 그 길목에 노근리가 위치해 있다. 노근리의 일반 사람들은 전쟁의 소문만 들었지 전쟁의 양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따금 읍내 다녀온 사람을 통해 전해들은 전황은 북한군이 쳐내려오고 있고, 이승만이 부산으로 도망갔고, 미군이 와서 우리를 지켜줄 거라는 희망섞인 기대뿐. 그렇게 어정쩡한 시간이 지나고 7월 26일. 노근리에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다. 미군들이 주민들에게 피난을 지시한 것이다. 주민들은 떼를 지어 피난길에 오른다. 수백 명이. 그들은 지게마다 한가득 살림살이를 짊어지고 남으로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 철길을 따라 무작정 남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백 명의 사람들은 또 다른 미군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 미군은 지금 내려오는 피난민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저 피난민 무리 속에 북한군이 섞여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갑자기 총질을 한다면... 갑자기 엉뚱한 전투지역에 내던져진 미군은 피난민만큼이나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다. 미군 사병은 선임사병에게 물어본다. “어떡할까요?‘ 그 넓은 들판에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미군들에게는 조직적인 명령체계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무전기도 제대로 작동했는지도 의문이고. 하늘에선 전투기가 날아와서 기총소사를 한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Kill'em All“ 소리친다. 그들은 마구 총을 쏜다. 비극은 한순간에 시작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살아남은, 그리고 부상을 입은 수백 명의 피난민들은 철길 아래 쌍굴 밑으로 피한다.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그리고 끔찍한 총질을 방금 경험한 미군은 ’쌍굴‘로 피난민을 몰아넣고, 사흘밤낮을 총질한다. 조금이라도 소리가 들리면, 누군가 움직이면 총알을 쏟아 붓는다. 그렇게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까지 노근리 철길에서, 그리고 ’쌍굴‘에서 수백 명의 흰옷 입은 백성들이 미군의 집중사격에 희생된다. 명령/확인체제도, 의사소통도 막혀버린 채 말이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은 누군가의 소리에 지옥에서 깨어난다. (북한)인민군(소년병) 하나가 ”미군은 갔어요. 이제 나와도 되요.“라는 소리.


비극의 봉합


이 어이없는 상황은 전쟁초기 실제 한반도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극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인텔리겐차들이 빨갱이로 처형되는 암울한 시절에, 못 배우고 가난한 시골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학살 정도는 금세 잊혀질 ‘그들만의 악몽’일 뿐이다. 그때 수백 명이 죽었다. 보도에 따르면 한여름 이 즈음이 되면 이 동네 여기저기서 동시에 제사를 지낸다. 비극적 ‘떼제사’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부상을 입었다.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비겁함과 두려움에 입을 다문다. 아니 그때 어디에 하소연하고 어디에서 정의를 찾을 것인가. 그 후에도 전쟁은 3년간 지속되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미군도, 미국 정부도, 그리고 당연히 한국정부도 모든 것을 침묵과 외면 속으로 과거를 봉인하고 만다. 죽은 자는 있어도 죽인 자가 없는 억울한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비극의 부활


그러다가 1990년대에 와서 노근리 주민이 당시의 일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일부 매체들이 그 사실을 전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미성숙한 국가일 뿐이었다. 노근리의 목소리를 단박에 세계에 알린 것은 부끄럽게도 우리 언론이 아니라 외국 언론이었다. AP통신의 탐사보도팀은 노근리 사건을 추적, 보도한다. 미국의 숨겨진, 묻힌 자료를 파헤치고, 살아남은 자들을 찾아내어 그 기록과 기억으로 50년 전 한국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살아있는 미군 참전용사와 아직도 살아있는 희생자의 입을 빌어 50년의 비극을 되살린 것이다.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AP보도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미국 국방성도 마지못해 조사를 시작했고 당시 클린턴 대통령도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기사를 바탕으로 영국 BBC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킬 뎀 올>이다. 2002년 2월 BBC2를 통해 방송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 EBS채널을 통해 소개되었다) BBC다큐는 영상의 힘, 진실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갑자기 전선에 투입된 미군들. 그리고, 평화롭기만 했던 시골마을의 피해자들을 보여준다.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 두 편을 소개하면 이렇다.


철길에서 총질이 시작된다. 어머니 손을 잡고 피난 가던 어린 소녀. 총에 맞은 어머니는 앞에서 쓰러지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죽은 모양이다. 소녀는 총격 때문에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양쪽 눈알이 튀어나온다. (눈알이 대롱거리는 것이다!) “아유 어머니, 앞이 안보여요. 이 것 좀 떼 내어 주세요. 어떻게 해보세요...” (어머니는 이미 총을 맞아 코앞에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숨을 헐떡인다.) “아이고 내가 움직일 수가 없구나......” (소녀는 계속 중얼거린다. 머리 위로, 자신의 양옆으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러나 앞을 볼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소녀는 그 날 두 눈을 잃는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이고. 그때 내가 죽었어야지. 왜 살아서....” 그 소녀는 50년, 60년을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남으신 것이다.


철길에서의 한 번의 학살극이 끝나자 사람들은 쌍굴 속으로 서둘러 도망친다. 사람들은 쥐죽은 듯 움츠리고 있지만, 미군들은 기관총을 정조준하고 조금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곧바로 사격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갈바닥을 파헤쳐 조금이라도 밑으로 숨는다. 이미 죽은 시체들로 바리케이드를 친다. 조금 전에 어미를 잃은 아기가 사래 걸린 듯 운다. 그 소리에 미군은 또다시 미친 듯 총알을 퍼붓는다. “아이고 어찌 좀 해봐요. 애 소리 때문에 우리 다 죽어요.”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 “그때 그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한쪽 물가로 데려가더니 아이를 물속에 집어넣고 죽이더군요.” 그렇게 노근리 사람들은 죽고, 살아남은 것이다. 50년의 세월. 죽었다는 억울함보다는 살아남았다는 원한으로.


인간의 굴레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일으킨 극악무도한 범죄라고 정리하면 끝난다. 하지만 노근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전쟁의 이면에는 그 한 줄로 단정할 수 없는 수많은 사연과 기구한 운명이 있는 것이다. BBC다큐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와 같은/유사한 양민학살사건이 60차례나 더 있었던 것으로 소개한다. 포항 앞바다에 피난 온 수백 명의 양민들을 목표로 미군 함정이 포격을 가해 순식간에 수백 명이 죽은 경우도 있다고 소개한다. 미국은 AP보도 이후 노근리 사건의 실체를 인정했지만 나머지 사건에 대해선 묵묵부답이다. 이런 기막힌 사건은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모양이다. 지금도 미국은 전쟁초기, 한국이 위태로웠던 시기에 투입된 사병들이 교전규칙에 따라 살기위해 총질을 하였던 비극이라고 말할 뿐이다.


당시 총질을 했던 미군 병사는 이미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 사람의 고백을 들어본다. (BBC다큐) “나도 총을 쏘았다. 소녀가 쓰러지더라. 나는 요즘도 꿈을 꾼다. 소녀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얼굴을 볼 수 없지만 그 소녀가 누군지 나는 안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지옥에 살아온 것이다.” 총을 쏜 사람도 역시 지옥에서 살아온 것이다.


노근리 사건이 최근 영화로 만들어졌다. 송강호 등 한국 배우들이 출연료 없이 이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는 8년 만에 완성되었다. 영화는 고요하고 날카롭다. 피난민에게 총질하는 미군이나 죽어가는 백의민족은 제각기 말이 없다. 아무런 정치적인 구호도, 왜 죽는지 억울하다는 함성도 없다. 그 어느 여름날 대한민국 노근리 철길 옆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제목은 <작은 연못>이다.  (글 박재환 2010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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