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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환 Nov 21. 2020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가갸거겨 기릉지

배꽃나래 감독,2019 (2020.11.20 KBS독립영화관) 

해마다 이맘때 즈음이면 충무로의 미래를 책임지고 싶어 하는 야심에 불타는 영화감독들을 위한 영화제가 열린다. [서독제]라고 말하는 ‘서울독립영화제’이다. 올해는 11월 26일일부터 12월 4일까지 CGV압구정에서 열린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한국독립영화’를 사랑해 마지않는 KBS 독립영화관에서는 작년 [서독제]에서 호평 받았던 두 편의 영화를 편성, 방송한다. 최우수단편상을 받은 배꽃나래 감독의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과 관객상과 열혈스태프상(조영천 촬영감독)을 받은 궁유정 감독의 <창진이 마음>이다. 두 편 다 재미있다. 아주!

배꽃나래 감독이 각본과 촬영, 편집까지 다 한 영화 <누구는 알도 누구는 모르는>은 나이 여든이 넘어 한글 배우기에 나선 시골 할머니를 이야기한다. 작년 김재환 감독의 <칠곡 가시나들>이란 작품을 비롯하여 곧잘 TV다큐에서 자주 다룬 열혈만학도 이야기려니(?) 생각했지만 보면서 또 다른 이야기 진행방식에 쏘옥 빠져들게 된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논산에 사는 안치연 할머니의 일상을 쫓는다. “왜 자꾸 찍어. ”라며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 하지만 손녀(감독)와 할머니(주연배우)의 밀당은 흥미로운 ‘대한민국 여성’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마을회관에 모인 만학도들. 전부 할머니다. 남자들은 나이 들어 한글을 배운다는 게 남세스러운 일일까. 아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안다. 대한민국에서는 여자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금기시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신시대? 대한민국 건국초기? 아니, 훨씬 전부터. 그래서 한글은 여자나 배우는 ‘암글’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배움의 차단벽은 높았다. “학교 가고 싶었는데, 못 가게 하는 엄마한테 맞았어”라고 기억하는 할머니도 있다. 그들은 뒤늦게 또박또박 “기역 니은 디귿”을 배운다. 일기를 쓰기 위해, 성경책을 읽기 위해서란다. “내가 글을 익혀 일기를 쓴다면 책이 수십 권이 될 거야.” 할머니에겐 얼마나 할 말이 많은 삶이었을까.


평이하게 이어지던 이야기는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풍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들의 소싯적 이야기다. 그들이 10대 초반일 때, 밤이 되면 동네 친한 소녀들은 한방에 모여 서로의 우정을 다짐하는 거창한 의식을 치른다. (중국 태평천국의 난을 다룬 이연걸 주연의 영화 ‘명장’의 원제목은 ‘투명장’이다. ‘투명장’이란 반란군에 합류하기 위해선 특별한 의식을 치르는데 ‘사람의 목’을 베어 와서 혁명의지를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소녀들이 그런 잔인한 의식을 치르진 않을 것이다. 팔목에 특별한 장식을 하는 것이다. 이런 풍습/행위를 일컫는 용어가 따로 없다. 할머니들도 “그게 뭐라더라?” 하면서 ‘기릉지’(그릉지)라고 말한다. 자신의 살갗을 (먹물을 먹인 실을 꿴) 바늘로 찔러 얇게 들어 올리는 것이다. 일종의 문신(태투)이다. 글자나 기호를 새기는 수준은 아니다. 오랫동안 그냥 점 같은 상처, 흔적만 남는다. 소녀들은 “너와 난 이제 친구야”, “이게 사라지면 그 사람은 죽는 거야‘라는 우정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할머니들은 다들 그런 기억과 그런 흔적이 몸에 남아 있다. 세월이 너무 왜 지나 누구와 그런 도원결의를 맺었는지는 기억하지를 못한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한글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은 ‘기역 니은 디귿’과 몸에 새긴 ‘기릉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래전 본 <뉘슈>(女書/여서)라는 다큐가 생각난다. 중국 어느 지방에선 글 배우기에서 배척당한 여자들이 자기들만의 문자를 만들어 은밀히 소통을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참 힘든 삶을 살았을 할머니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런 흥미로운 작품을 만든 배꽃나래 감독에게 박수!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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