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시아마 감독 Portrait of a Lady on Fire
풍속사(史)에서 ‘사진신부’(Picture-Bride)라는 걸 만날 수 있다. 특정시기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직 사진으로만 결혼할 상대를 간택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간 남성이 고국의 여인네를 오직 사진으로만 보고, 결혼하여 일가를 이룬다. 조금 앞선 시기 미국 서부로 간 일본남자의 형편도 비슷했다. 미국 항구에 도착한 일본 예비신부들은 자신의 신랑을 알아볼 수 없었단다. 노동자가 한껏 꾸민 사진과 실제 부두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판이했기에. 아마도 ‘사진후반작업의 원조’이리라. 하지만 신랑은 그림 속 신부를 기꺼이 배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출발은 그러하다.
영화는 18세기 신부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의 이야기이다. 사진도, 전화도, 인터넷도, 더불어 여성의 권리도 그다지 없던 시절이다.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를 의뢰받는다. 초상화를 완성해 신랑 측에 보내면 혼담이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이 결혼을 원치 않았고, 그런 목적의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는 더더욱 싫었다. 이제 마리안느는 며칠 동안 엘로이즈의 말벗이 되어 해안가를 같이 걸으며 그녀의 외모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화폭에 최대한 닮게 그려 넣을 것이다. 엘로이즈를 유심히 관찰할수록, 대상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수록 화폭의 초상화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동감 넘치고, 존재감 있는 엘로이즈가 자리를 잡게 된다.
프랑스 여성감독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봉준호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탔던 지난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었다. 이번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는 단 하나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지만 이달 말 열리는 프랑스 세자르상 시상식에서는 9개 부문 10개의 후보에 올랐다. 노에미 멜랑과 아델 에넬이 동시에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이다.
영화는 특별한 상황에 놓인 화가와 모델의 관계를 보여준다. 화가란 대상을 쳐다보고 관찰하고 응시하는 존재이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살려 화폭에 대상을 옮겨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창조자이다. 물론 대상이 되는 인물은 단순한 모델이 아니다. 불편하고 비타협적인 대상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유폐된 섬에서, 군중과 유리된 저택 안에서, 그리고 탁 트인 해변에 둘을 던져 놓고, 상호작용을 기다린다.
대상을 화폭으로 옮기는 단순한 임무는 특별한 상황으로 새로운 이야기로 전이된다. 화가도, 모델도, 시녀도, 그리고 그림을 주문한 모델의 어머니도 결국 여자이다. 자연스레 여자의 이야기가 스크린의 중심에 서게 된다. 분명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대우를 이야기하면서 영화는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을 보여준다. 하녀 소피(루아나 바이라미)에 이르기까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놀라운 것은 ‘그림’과 함께 음악이다. 여성들만의 마치 금지된 한밤의 모닥불 축제에서 펼쳐지는 화음은 신분을 초월하는 영적 일체감을 안겨준다. 그 때 왜 불이 붙었을까. 이어지는 불타오르는 초상화까지.
물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것은 2천년 동안 이어져온 화자의 시선이다. 에우리디케는 왜 그랬을까. ‘모델’처럼,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일이었을 텐데. 삶은 끝나고, 인연은 종결되었고, 그들의 사랑은 추억으로 남아야할 것이다.
하얀 드레스의 환상은 화가의 환상이다. 음악회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 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안드리안 챈들러의 격정적 바이올린 선율로 비발디 ‘사계’ 중 여름 3악장을 들려준다. 그날의 기억을 활활 불태우고, 초록색 드레스의 초상화를 불태우고, 28페이지의 기억을 불태울 기세로. 하지만 엘로이즈는 영원히 마리안느의 기억에 남아있을 잔상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처럼. (박재환 영화리뷰 20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