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린 Dec 13. 2023

나의 기준이 시작이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자기 페이스로 달리는 당신에게>

요즘의 가장 많은 지표가 되는 말은 '당신은 나다움을 갖고 사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다움이 무엇일까? 어린 시절에는 꿈을 좇으라 했고, 어른이 된 그 어린이에겐 나다움을 쫓으라 한다. 그것의 답은 어디서 기인하길래 꿈과 나다움을 쫓아가라고 하는 것일까? 문득 떠올려 보다가도 그냥 하루를 넘기게 된다. 현재는 어쨌든 현재를 살아가야 하니까.


생각의 꼬리를 물던 것을 끊어주는 것도 재밌게도 생각이다. 이번 나의 꼬꼬무를 이어가던 생각도 이 책을 읽고 넘기다가 새로운 생각이 끊어줬다. 그렇게 이 글을 잠시 기록하게 된다.


창작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다. 내일도, 모래도 계속해야 하는 일이다.
자기 페이스를 아는 게 중요하다.
- 모든 멋진 일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중에서 -


다시 주제를 이어가 보자. 난 왜 이 구절에서 '꿈'과 '나다움'을 발견했을까? 답은 이렇다. 세상은 가끔 단거리 레이스든, 장거리 레이스든 무관하게 경쟁의 의미가 더 뚜렷해지기도 한다. 사실 가끔은 아닌 것 같다. 이 경쟁 속에서 지난번에 기록했던 글의 주제가 또 꼬리를 문다.


"좋아하는 일을 택해야 하나요? 잘하는 일을 그대로 해야 하나요?"


이 이야기의 시작을 한 번쯤은 돌아봐 보는 건 어떠한가?  삶의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해도, 암묵적으로 100세 인생인 이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 둘 중 내가 원하는 쪽을 택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왜 우린 멈칫하는 걸까? 내 기준의 삶만이 아닌 '또 다른 책임감'이 따라붙는다. 경제적으로도, 지적으로도 풍요로워지며, 내가 좋아하는 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 더하여 가족,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하는 것. 여기까지 책임으로 둘러싸게 된다.


여기서 한번 더 난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는가?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챙기는 시간까지 고려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아등바등하며 살 이유가 우리에겐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가는 걸까? 시작은 서두에 얘기한 경쟁 시대 때문일 수 있다. 나의 기준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으로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것, 어? 잠시만, 저 세상에 사는 저 사람은 부모님을 모시고 신라 호텔에서 밥 한 끼를 대접하잖아? 이 문장은 편파적일 수 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안 그렇게 느낄 수도 없는 현실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회의 잣대가 현혹하는 잣대인 줄도 모르고 자신의 삶을 내던지거나 맡기는 선택을 할 때가 있다. 나의 부모님께 어떤 식사를 대접하든 누구나 관여할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남과 비교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본능인 경쟁 욕구는 스치고 지나간다. 그 스침에 단번에 현혹된다. 여기서부터 나의 기준이 누군가의 기준으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내가 바라는 이상향, 혹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부러움 대상의 기준만이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늘 누군가의 경험과 배움에서 또 다른 배움을 취득한다. 처음엔 그 누군가가 나만의 이상향이지 모두의 기준은 아니다. 저마다 각자 이상향에 대한 설정을 달리 잡는다. 하지만, 좀 더 멀리서 보았을 때 내가 동경하는 타인이 마치 모두의 기준인 듯한 착각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얘도 결혼했구나. 이쁘다. 요즘 다들 하나씩 가는데 나도 슬슬 생각해봐야 하나?"
"이 사람은 직장 다니면서 마케팅 글도 쓰네. 요즘 부업하는 직장인들 많은데 나도 한번 해봐?"
"얘는 인스타 하나 잘해서 인플루언서도 되고, 진짜 놀랍다. 요즘은 인스타로 전부 브랜딩하나?"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다. 하지만, 이 생각의 흐름을 타지 않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을 더 찾기가 쉬운 결과일 수 있다. 지금 잠시만 브랜딩 강연을 보아도, 컨설팅 홍보글을 봐도 어느 것 하나 형식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월 천만 원'. 단어만 봐도 마음이 웅장해진다. 이 후킹도 요즘은 사그라들고 있다. 하지만, 강타했을 당시는 모두가 염원하지 않는 게 이상한 듯 보일 정도로 강력하게 몰아가기도 했다.


또 다른 예시를 든다면, 어떤 이는 4시간에 50,000원을 번다. 본인은 4시간에 5,000원을 번다. 그럼, 당연하게 본인도 50,000원이 벌고 싶을까? 묻기도 전에 벌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똑같이 벌거나 저 사람보다는 더 벌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의 전부인 것처럼 혈안이 되기도 한다. 그때부터, 저 사람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벤치마킹이 시작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1시간에 N개의 업무를 수행했고, 계획하는 방법은 이러하며, 1시간 단위로 성과를 체크하는구나. 그럼 이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적용할 것을 빠르게 짚은 뒤 또 다른 공식을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첫 영감의 대상은 저 사람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모두가 정말 50,000원을 쫓아야만 하는 게 맞는 걸까? 실제로 모두가 그렇게 염원하게 될까? 아니다. 어떤 이는 4시간에 5,000원도 감사할 수 있고, 50,000원도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나의 기준으로 시작되는 것 같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보고, 닮고 배워 체득하는 것을 먼저 택하게 된다면 내가 갈망하는 대상 하나의 기준을 먼저 바라보게 된다. 시작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인데, 누군가를 갈망하기 전에 "내가 정말 갈망할까?", "내 페이스는 저 사람과 비슷할까?", "나는 현재 어떻게 하고 있었지?", "나라면 50,000원을 어떻게 만들어볼까?" 이처럼 내 기준을 먼저 확인해 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누군가 이전에 나를 제대로 보는 게 가능할 수 있다.


돈으로 비유를 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최대 관심사인 돈이 가장 쉬운 비교 방법이다. 중요한 건, 돈의 액수 대비 시간 능률이 아니라, 각자 누군가의 기준이 된 게 마치 모두의 기준인 것 같고, 그게 트렌드화 된 것 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이 시점에 필요하다 느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베짱이처럼 살고 싶다면 베짱이만큼 재능이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