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소한 거 하나로 사람 인생이 바뀐다니까.
- 영화 <콜> 中
영화 <콜, The call> (2020)은 11월 27일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로 공개되었다. 한 통의 전화로 연결된 서로 다른 시간대의 두 여자의 운명과 사투를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다. 배우들의 열연과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서사로 개봉 직후부터 지금까지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영화 예고편 영상이나 관객들의 관람평을 보면 영숙을 대부분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마'로 판단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숙을 연기한 배우 전종서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수식어에 상관없이 영숙은 세상과 고립되어 미성숙하고 나약한 채 자랐고 그래서 더욱 자유와 삶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강한 인간으로 볼 수 있다.
"시발", "너 내가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야" 외치는 주인공의 발악은 이러한 살해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자주 내뱉는 말이 아닌가. 선과 악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사회에서 그럼에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살인마를 영화 <콜>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단 한 번의 경고
영숙과 서연이 우연한 전화 연결을 통해 세대를 넘어 인간적인 교류와 감정을 나누는 부분이 극 중반부까지 이어진다. 둘은 같은 장소, 다른 시간에 공존하면서 엄마에 대한 공통된 트라우마를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영숙은 친엄마가 죽은 뒤 새엄마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서연은 아빠가 가스 사고로 죽은 뒤 아픈 엄마와 불안정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서연의 가족을 본 영숙은 "어쩌면 내가 너희 아빠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서연의 아빠를 살린 뒤 "이게 진짜 되는, 신기한" (과거와 미래가 서로 영향을 받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서연의 현재에 과거의 영숙이 살린 아빠가 등장하자, 영숙과의 사이는 자연스레 소홀해진다. 서연과의 통화가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던 영숙은 "함부로 전화 끊는" "버르장머리 없는" 서연에게 화를 내고, 조금씩 둘 사이에 불안한 균열이 시작된다. 그러던 중 서연은 인터넷에서 새엄마가 자택에서 영숙을 살해한 사건을 발견하고, 영숙에게 그의 죽음을 경고한다.
그 사실을 들은 영숙은 그날 밤 새엄마를 살해하고 어설픈 자유를 손에 쥔 채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욕망은 햇살을 맞으며 마음껏 활개를 친다. 영숙은 딸기농장 성호 아저씨와 수사관 그리고 서연의 아빠까지 살해하며 서연의 과거와 현재를 망쳐놓고, 마침내 서연을 노린다.
현재의 서연도 그녀만의 방식대로 영숙의 살인에 맞서 분투한다.
울트라맨을 삼킨 살인마
울트라맨 어렸을 적 내 꿈에
울트라맨 여긴 진정 어떤 나라인지
울트라맨 이제부턴 진정 난
울트라맨 슈퍼 초울트라 매니아
- 서태지 <울트라맨> 中
영숙은 서태지 팬이며 그의 음악과 패션을 좋아한다. 기성세대를 향한 저항과 반항, 한 세대를 뒤엎은 과격한 영향력, 주변을 모조리 파괴해버리는 파격.
"울트라맨이야"를 듣는 영숙에게 잠재된 공격성과 파괴력의 "슈퍼 초울트라 마니아"가 서서히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속신앙에 갇힌 금기 가득한 낡은 새엄마의 나라를 부수고 세운 진정한 영숙의 나라는 "울트라맨"의 붉은 반란과 혁명으로 칠갑한다.
영웅이란 존재는 더는 없어
이미 죽은 지 오래 무척 오래 저 태양 아래
바로 이날의 영웅은 바로 너야
- 서태지 <울트라맨> 中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왠지 내 생일 같아. "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신세대는 영웅도, 신화도, 전설도, 우상도 없는 세대이다. 그들은 기성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빼앗겼던 본인의 목소리를 탈환하여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한다. 그렇게 스스로의 영웅 "울트라맨"이 되어 위협이 될만한 것들은 모조리 상처 내고 살해하여 냉장고에 처박아 버린다. 숨통이 끊겨 차갑게 식어버린 세상은 더 이상 과거의 결핍을 환기하지 않는다.
영숙은 새엄마 살해를 기점으로 본인을 얽매고 있던 전통과 관습을 완전히 단절하고, 우상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가졌던 일말의 순수마저 파괴한 뒤 다른 곳으로 비약한다.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제외한 어떤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영숙은 오로지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만 들을 수 있는 리듬 아래 살아가는 이어폰을 낀 혁명가다. 이어폰을 낀 혁명가는 외부와 단절하고 내부의 공명을 감지하며 본인만의 혁명을 꿈꾼다.
그러나 문제는 이 혁명가의 손에 들린 것이 90년대 구형 전화기와 칼 그리고 소화기뿐이라는 점이다. 단절된 혁명이라는 모순어법은 자유와 해방이 지닌 가능성과 동시에 엄청난 파괴력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폐쇄된 세상에서 증가한 무질서 상태의 에너지는 언제든지 터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무분별한 파괴의 미래는 재건 불가한 혼돈과 파국의 연장선일 수밖에 없다.
고립된 혁명가에게 미래란 과거의 연속 재생일 뿐, 신선하고 새로운 리듬의 창조는 기대할 수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허한 살해. 영숙의 파괴력을 '울트라맨' 같은 혁명가가 아닌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로 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과거를 발골하는 포식자
영화 <콜>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전화기라는 소재로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과거와 현재를 동일 선상에 재배치한다.
이러한 시간 변형은 상한 기억의 과거는 먹어치우며 싱싱한 현재를 탐닉하고, 동시에 달콤한 미래도 맛보기를 원하는 인간 근원의 욕망을 자극한다.
같은 공간에서 상호작용하는 과거와 현재, 소멸과 생성, 죽음과 삶은 마치 고대 신화 속 우로보로스를 연상케 한다.
매 순간마다 재생되는 현재와 이를 쉴 새 없이 갉아먹는 과거의 무의미한 대결은 운명이란 거대한 굴레 아래서 반복 순환될 뿐이다.
과거를 바꾸어 더 나은 현재를 누리고자 했던 서연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서늘한 냉장고에 갇힐 위기에 처한다.
이처럼 영화는 타임슬립의 독특한 변주를 통해 초월적 영역에 도전하는 유한한 인간의 욕망과 투쟁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영숙이니? 일이 잘못돼도 전화기는 끝까지 가지고 있어. 그래야 다시 바꿀 수 있으니까.
현재의 영숙은 과거의 영숙과 연합하여 기존의 시간 개념에서 벗어나 스스로 운명을 재구축하고자 한다.
하지만 새엄마가 예언했던 대로, 살아남은 영숙의 "앞길의 줄초상"은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따라서 결정된 운명 앞에서 최후의 승자는 아무도 없다.
가까스로 눈을 뜬 영숙도 결국 정해진 운명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으며, 그녀가 걷는 길은 앞으로 새로운 미래가 아닌 핏빛 과거의 무의미한 덧붙임인 것이다.
토막 난 현재의 무의미한 꿈틀거림
영화 <콜>은 평범한 개인의 연대가 승리하는 결말이 아닌 섬뜩한 반전으로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뒤로 한 채 알 수 없는 미래를 앞에 두고 살아가는, 찰나로 이루어진 현재의 나약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바꾼 현실의 대가는 참혹하다. 서연의 패배는 상처 나고 멍든 기억을 대하는 현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더라도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일 것이다.
한편 예정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부활한 악마는 지금 이 현재에서 손 쓸 수 없는 이탈자이자 돌연변이다.
가장 큰 문제는 살아남은 영숙에게 내재된 결여와 분노도 과거로부터 끈질기게 살아남아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
영숙의 손에서 토막 난 어제와 오늘은 싸늘하게 식은 채로 냉장고에 갇혀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내일은 예고된 살인마의 추격에 쫓겨야 할 슬픈 운명에 처했다.
예고된 운명,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분출되는 불안정한 분노와 혼란. 어쩌면 이 곳에서 인육을 탐하는 악마는 영숙이 유일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제한된 시공간과 한정된 자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먹고 먹히는 이 혼돈의 세상은 마치 거대한 우로보로스와도 같다.
영원히 독식하는 머리가 될 것인가, 끊임없이 먹히는 꼬리가 될 것인가.
<콜>이 보여주는 영숙의 거침없는 파괴와 그 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하는 수현의 공동체는 관객들에게 소수의 가해자에 짓눌린 다수의 피해자들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와, 그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협과 반전을 상기시킨다.
고대 신화 속 우로보로스
우로보로스우로보로스는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뜻으로, 고대의 상징으로 커다란 뱀 또는 용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형상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나타난다. 수세기에 걸쳐서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이 상징은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를 지녀 윤회사상 또는 영원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다.
기본 자료
김사과, <미나>, 서울: 초판; 창비, 2008, 강유정 문학평론가의 해설 '이어폰을 낀 혁명가' 참고
넷플릭스 영화 <콜, The call> 2020, (감독: 이충현 / 출연: 박신혜, 전종서, 김성령 등)
배우 전종서 인터뷰
사진 출처
넷플릭스, <콜>
위키백과, 우로보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