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욕망의 이중주 ; sweet home

멸망하기로 결심한 인류의 지옥도

by helmi
감로 정화(甘露幀畵), 조선


요즘 제일 하찮은 게 사람 목숨 아닌가?

- 드라마 <스위트 홈> 中



망해라 망해라 했더니 정말로 망해버렸다. 기존의 윤리도, 질서도 모두 다 무너져버렸다. 파편화된 개인들도 하나둘 서서히 괴물화가 진행되고 있다. 유예와 긴장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괴물화를 통제하고 있는 이것이 계시하고 있는 것은 인류의 구원일까, 새로운 포식자의 탄생일까.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 홈>은 평범한 일상과 그것의 종말을 함부로 겹쳐버렸다. 그 파괴적이고 파격적인 세계관 속에서 최고조에 달한 혼란과 무질서를 화려한 그래픽과 연출로 즐겁게 담아낸다. 예상치도 못한 종말은 인간의 내면을 샅샅이 해체하고, 그렇게 해방된 욕망은 거리로 걸어 나온다. 이 욕망은 자신을 억압하고 있던 주체를 장악하고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고 파괴하며 유희한다.


이 드라마의 뚜렷한 차별점은 외계에 의한 침입이나 감염이 아닌 인간 내부로부터 증식한 욕망으로 괴상한 변이체가 된다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철저하게 인간의 경계 내에서 벌어지는 인류의 비극이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대척점에 인간이 서 있다는 의미와도 같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으로 괴물이 된다"는 저주는, 한쪽의 번성과 풍요가 다른 쪽의 결핍과 빈곤을 재생산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대한 도전적인 은유다.


한편 주인공 차현수를 비롯하여 괴물의 초자연적 능력과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지닌 특이한 변이체의 탄생이 예고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완벽한 신체를 가진 존재로, 인간의 나약함과 유한함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스위트 홈>이 그리는 미래는 고장난 현재의 연장선일까, 신선한 새로운 변화일까.

인간과 변이체의 대결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만약 그것의 승리가 강력한 무기 사용이나 무차별적 파괴 등 기존의 무력 전쟁과 유사한 방식으로 성취된 것이라면, 이들의 미래는 지금과 유사한 질병의 재발 가능성을 내재한 본질적인 한계를 지닌 취약한 시대가 될 것이다.


드라마가 아직 완결되지 않았기에 그 결말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시즌 1에서나마 이 변이체가 다루어지는 방식을 고찰해본다면 그것이 시사하는 미래의 가능성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살아야 갈 수 있는 스위트 홈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


- 자크 라캉



무언가를 향한 욕망은 그것에 대한 결핍을 의미한다. 그 욕망을 실현해도 또 다른 것을 욕망하는 에너지의 근원에는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갈증과 공허가 자리 잡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대부분 타자의 시선이 깃든 타인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개인이 유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하에 끊임없이 정의되고 존재한다. 21세기 우리의 사고는 오래전부터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사회가 요구하는 타자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다. 그 가치는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제하는 엄격한 기준이 되어 결핍과 욕망들을 생성해낸다. 이것들은 얽히고설켜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주체가 나약해진 틈을 타서 세상 밖으로 나온다.



따라서 드라마 <스위트 홈>의 괴물들은 개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거짓된 욕망이자 불행한 결핍을 상징한다.



이기적인 만행으로 매 회마다 분노를 유발하던 슈퍼 주인은 수북한 털뭉치 괴물이 된다. 그가 사람일 때 머리숱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욕망은 풍성한 머리털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겠다. 이것은 진정한 주체의 욕망이었을까. 렇다기보다 숱 많은 젊은이의 머릿결을 아름답다고 광고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황된 열등감과 소유욕로 볼 수 있다.



한편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여인은 아주 거대한 태아가 된다. 그가 아픈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이유는 엄마에게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을 요구하는 모성 판타지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위대함을 광고하는 세상은 죽은 아기를 욕망하게 하고 결국 허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엄마'이고 싶었던 욕망과 '아기'에 대한 강한 집착은, 엄마와 아기가 한 몸에서 교감할 수 있는 상태인 '태아'로 형상화되었다.




주인공 차현수의 경우 괴물화를 버티고 있는 인간으로서 절대 괴물이 되지 않겠다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는 다시 말하자면, 괴물의 전투 및 회복 능력만 취하겠다는 의미로 '평범한' 인간 형상에 대한 욕망이다. 끝까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즉 인간이 아닌 존재는 거부하는 사회의 이기적인 욕망의 발로인 것이다.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차현수는 겉으로 이를 최대한 숨기고 공동체에 편입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차현수가 괴물의 능력으로 괴물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인간들의 영웅으로 귀환하는 설정은, 인간 중심 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타자 the other를 구분하고 타자 outsider를 재생산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욕망이 이렇게 복합적이라면, 인간에게 괴물화는 극복할 수 없는 저주인 것일까.



본인의 무의식은 스스로도 알 수 없기에 저주의 실체는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괴물화가 시작된 사람들은 흉측하게 변해버릴 까 봐 두려워하며 아예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결여의 주체이다. 이를 충족하고자 주체는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또 욕망한다.



이러한 타인과 욕망의 굴레에서 주체는 부정적인 타자가 투영된 욕망을 구분하고 그것이 발휘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한다.


또 다른 타자를 생산하는 폭력적인 타자의 욕망은 거부하고,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포용으로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곧 괴물에 맞설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스위트 홈>은 자신의 무의식을 성찰하고 보듬을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괴물화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저주에 맞서는 용감한 이들의 이야기는 내면을 잠식한 타자에 저항하는 주체의 성장담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괴물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곧 우리의 이야기다.



인간이 인간에게 괴물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거짓된 타자의 유혹을 견뎌 낼 튼튼한 내면의 안식처, sweet home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의 종말과 탄생



아직 시즌 1에 불과하지만 <스위트 홈>에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독특한 괴물들이 등장한다. 이것들은 모두 타자 the other의 욕망에 희생된 또 다른 타자 outsider이다.


괴물이 날뛰는 세상은 불안정한 욕망이 실체화되어 활개를 치는 새로운 타자 the other의 세상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이는 기존 타자 the other파멸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사회는 개인이 절대 홀로 극복할 수 없는 내면의 결핍을 만들고 거짓된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욕망으로 그것을 채워주는 척하며 개인을 통제해왔다. 이제 개인을 억압하던 모든 것이 파괴된 세계에서 욕망은 주인을 잃고 혼란 속에 방황한다.

이제 인간은 무엇을 욕망해야 할까. 이들은 기존의 공동체적 질서와 이기적 생존 본능이라는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꾸준히 괴물로 변해 가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해 간다.



죽어버리거나, 괴물로 살아남거나.



어떤 것을 선택하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린맨션 생존자들이 이룬 공동체는 아직까지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인간적 감정이 복합적으로 혼재되어 있기에 아슬아슬한 상태에 놓여 있다.
순간의 선택이 모두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서, 결국 어떠한 경우도 누군가의 희생과 남은 자들의 죄책감을 더할 뿐이다.

괴물화가 진행되고 있는 차현수는 본인을 추방하지 않는 조건으로 생존자들의 무기가 된다. 아직까지 이곳에서 괴물은 인간적으로 소외당하는 타자다.
카프카 <변신>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리처럼 괴물화란 스스로 격리되어야 하는 명백한 타자의 조건이다.






인간의 쓸모



상업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이다. 따라서 대중매체는 그 장르에 따라 나름의 정형화된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 <스위트 홈> 같은 크리처물에도 대중의 요구에 따라 질서화된 법칙이 있다. 특별한 능력의 주인공, 정의로운 범인의 거룩한 희생, 평생을 거칠게 살아온 깡패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명을 구하려다가 맞이하는 안타까운 죽음, 괴물보다 잔인한 인간의 횡포, 그리고 막강한 힘을 가진 악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정형성을 진부함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특수 변이체로서 화려한 부활을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주인공의 비극은 전형적인 영웅 일대기의 복제판이기는 하다. 하지만 매체적 특성에 따라 상업성과 대중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그만큼 개인 위에 '대중'이라는 거대한 타자가 군림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이제 <스위트 홈>의 다음 시즌을 기다리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지금까지는 반인반괴(半人半怪) 차현수의 불행한 과거와 격변한 현재가 서사의 주축을 차지했다. 그 와중에 불의에 저항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들을 구하려는 모습을 통해 그의 인간성을 충분히 강조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괴물화를 조절하는 비결이 인간의 선한 감성이라는 암시를 읽어낼 수도 있다.


인간의 욕망이 원인이라면, 바로 이 욕망이 유일하게 괴물화를 극복할 수 있는 나름 합리적인 반격이 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여기서 욕망은 타자의 오랜 억압에서 깨어난 자유 의지의 욕망일 것이다.


이 드라마의 결말은 크게 두 가지로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보통 사람들의 강한 용기와 연대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기존의 세계를 회복한다. 둘째, 초현실적인 능력의 개입으로 일순간에 모든 것이 소멸된다. 그리고 소수의 초자연적 생명체가 개척한 다른 세계가 열린다.

어떤 결말이건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기존의 인간성을 어디까지 한정하고 어떻게 변주할 것인지가 중요한 지점이 될 것 같다.


어찌 됐건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쓰는 인간의 이야기다. 비현실적인 디스토피아적 상황 연출은 거들 뿐, 결국 인간이 메인이다. 동물적 감각 외에 인간의 복합적인 이성과 감정이, 그리고 인간의 형상이 앞으로 얼마나 쓸모 있을 지에 따라서 인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한동안 생태계의 지배자로 군림해왔던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판타지적 연출에만 집중하지 말고 부디 서사의 개연성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으로 이 글을 마친다.






기본자료: <스위트 홈 sweet home> (2020)


사진 출처 : 넷플릭스, <스위트 홈>

참고 자료: 넷플릭스, <스위트 홈>




비슷한 장르의 영화 추천 <캐빈 인 더 우즈> (2012)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도 우리가 타인의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충격적인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