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 김 현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The G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 (2018)은 책이 이어준 소중한 인연을 아름다운 영상미와 개성적인 캐릭터들로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 줄리엣과 낯선 건지 섬의 특이한 문학회가 이룬 책연(冊緣)은 작가와 독자 그리고 문학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런던의 작가 '줄리엣 애슈턴'에게 책 주문을 부탁하는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건지 섬의 농부 '도시 애덤스'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언급된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마음이 이끌린 줄리엣은, 아름다운 건지 섬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 무작정 섬으로 떠난다.
전쟁 피해 복구가 한창인 그곳에서 줄리엣은 무너진 마음을 복구시키는 유대와 소통의 힘을 알게 된다.
책으로 이어진 순수한 영혼들과 그들이 사는 섬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줄리엣은 화려하지만 차가운 런던의 생활을 정리하고 소박하지만 따뜻한 이들이 기다리는 건지 섬으로 향한다.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하는 일이다.
- 롤랑 바르트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그 속에 깃든 타인의 슬픔을 애도하면서도 이들의 상처마저 상업적으로 출판해야 하는 딜레마를 겪는다.
무언가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대상을 향한 애정과 그것을 직시하고 마주할 용기, 그리고 그것을 불멸화시키는 작업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작가 줄리엣은 건지 섬에서 전쟁이 이들에게 남긴 아픈 상처를 마주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서 한 차례 큰 성장통을 겪게 된다.
줄리엣의 성장 여정을 따라가 보면 어느새 부둣가로 마중 나온 포실포실 따끈한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서 우리가 되는 순간
줄리엣은 이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신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필명 '이지'로 쓴 소설 <Goes to war>이 꽤 괜찮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필명이 아닌 본명 '줄리엣'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런던 <타임>지의 제안을 받은 와중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 속에 적혀 있는 낯선 섬과 특이한 이름의 문학회에 묘하게 끌린 줄리엣은 흥미로운 '글감'을 기대하며 그들을 찾아간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소재는 당연히 세세하게 써서 알려야 한다.
유명한 잡지에 글이 실리는 것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
이것이 지금까지 작가로서 줄리엣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 회원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타임지에 오르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줄리엣이 원고를 목적으로 섬을 방문했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만다.
그들은 타임지가 얼마나 유명하고 자신들의 이야기가 런던에서 어느 정도 소비가치가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으며, 애써 되찾은 섬의 평화가 외부의 침입자로 깨지지 않기를 그저 간절히 원하고 바랄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줄리엣은 이기적인 시선에서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한 결례를 깨닫고 반성하게 된다.
원고라는 목적에 가리어졌던 순수한 시선에서 비로소 문학회와 건지 섬의 아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줄리엣은 이들이 겪는 상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게 되고, 진심을 다해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는다.
이제 줄리엣은 그들을 "조사 research"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도울 help" 목적으로 펜을 꺼내 든다.
섬을 닮은 사람들
전쟁 중에나 그 이후에도 늘 그래 왔듯이 섬사람들은 서로를 가로막던 벽은 허물고, 허물어진 관계는 다시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것이 건지 섬에서 아픔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방식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대도시와 달리 이 곳에서 특별한 개인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아픔은 이웃의 슬픔이며, 이는 곧 마을과 섬의 눈물 어린 역사이기 때문이다.
운 좋게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먼저 떠난 이웃을 생각하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지는, 그런 곳이 바로 건지 섬이다.
따라서 문학회의 과거를 타임지에 싣는 것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지난밤의 악몽을 박제하는 공포와도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이들이 아픔을 극복하도록 어떻게든 돕고 싶었던 줄리엣은, 낯선 섬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최선의 치유는 다정한 사람들의 따뜻한 모닥불 같은 유대와 소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줄리엣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타인의 삶에 공명하며 그런 자신도 건지 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정취를 서서히 닮아간다.
줄리엣의 마음에 잔잔하게 밀려온 감자껍질 파이의 짙은 향기는 시간이 흘러 줄리엣이 건지 섬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그리운 옛 얼굴들이 된다.
노래하는 법을 잊은 목소리에게
한편 런던으로 돌아온 줄리엣은 혹여 자신의 글이 건지 섬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누를 범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오랜 친구이자 편집자 시드니는 줄리엣이 잊고 있었던 가치를 일깨워준다.
두려워요.
만약 제 필력이 부족하면 어쩌죠?
오, 이제는 자신을 의심하는구나.
내가 아는 너는 그 정도가 아니야.
내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며 봐 온 너는, 원하는 걸 이루는 사람이었어.
너는 그럴 용기가 있는 애였거든.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을 의심하는 시기가 온다. 내가 용기를 낼 자격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이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여도 괜찮을지 수도 없이 걱정하고 돌아보며 자기 회의에 빠지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럴수록 어떠한 감정의 소용돌이에도 목소리를 잃지 않을 내 안의 작은 수호자를 키워야 한다. 작은 스노우볼 안에서 언제나 희망을 노래하는 줄리엣의 파랑새처럼.
이것의 이름을 붙여본다면 희망이나 믿음, 자신감 혹은 올바른 신념을 지켜낼 용기라 할 수 있겠다.
영원히 기억할 용기
마침내 줄리엣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의 이야기를 쓴 (하지만 출판하지 않을) 책과 함께 그의 진심을 전한다.
건지 섬이 간직하고 있는 평범한 이들의 특별한 용기와 사랑 그리고 그 섬을 지켜낸 이웃들의 이야기는 지나간 전쟁의 아픔보다 훨씬 강렬하고 생생하게 기억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줄리엣은 용기를 내어 작가로서 본인이 믿는 가장 옳은 일을 해냈고, 그런 그를 건지 섬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경계하던 처음의 태도와 달리 이들은 배달된 자신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받아들인다.
줄리엣이 건지 섬과 그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듯이 이들도 '런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 '줄리엣'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으며, 원고에 담긴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의 선택과 신념을 존중하고 응원하게 된다.
이제 줄리엣이 새로 합류한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은 예전보다 더 많이 읽고, 웃고, 사랑하며 건지 섬의 행복한 결말을 현재 진행형으로 써 내려가는 중이다.
읽는다는 것은 책과 독자 그리고 작가의 마음이 함께 만나야 이루어지는 커다란 기적이므로.
그리고 쓴다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의 용기와 믿음이 모여서 만든 진정한 사랑의 작용이므로.
차가운 감자가 따끈한 파이로 노릇노릇 구워질 때의 온도. 그을린 갈색의 따뜻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닥불처럼 뜨거운 용기와 사랑.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겁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짗도 개털억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갖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슳븐력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 (1936)
기본 자료
영화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 (2018), 감독: 마이크 뉴얼, 출연: 릴리 제임스, 미힐 하위스만, 퍼넬러피 윌튼 외
백석, 『사슴』,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과지성사, 1993.
사진 출처
넷플릭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영화의 원작 소설
메리 앤 섀퍼, 애니 배로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이덴슬리벨,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