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 가져간 새벽

너와 함께하는 아침은 다시 없겠지. _ 영화 <불한당>

by helmi

불한-당 不汗黨

명사

1.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사람들의 무리.

2. 남 괴롭히는 것을 일삼는 파렴치한 사람들의 무리.

[추가] 적막한 총성으로 지는 파아란 새벽들의 무리.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 최은영 <쇼코의 미소> 中




연애와 우정, 이 둘은 비슷한 베이스에 다른 시럽을 첨가한 음료와도 같다.


카라멜 마끼야또와 바닐라 라떼를 오가는 고민은 결국 둘 다 취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집은 바닐라 시럽 대신 파우더를 써서 좋아 라든가, 오늘은 왠지 묵직한 카라멜 향이 끌리는 걸, 같은 각자의 기분에 따라 결정한다.


영화 <불한당>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우정 이 둘 중에서 한 가지를 딱 골라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액션 누아르가 빼곡히 점령한 메뉴판의 끄트머리에 아주 작게 "감성 멜로"라고 적어 놓는다.


그리고 선택은 관객에게 맡긴다. 이 영화를 본 당신의 기분은 액션 누아르인가, 감성 멜로인가.



영화 <불한당> 칸 영화제 포스터와 국내 포스터






감았는가 감겼는가, Believe it or not



영화 <불한당>은 흔한 언더커버 장르물의 클리셰를 입체적인 캐릭터와 아슬한 감정선으로 비틀어버리는 영리한 서사를 가졌다.


거대 마약 조직 검거를 위해 범죄조직 대표 이사 '한재호'(설경구 역)가 있는 교도소로 잠입한 신참 경찰 '조현수'(임시완 역)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지만, 의도치 않게 서로가 서로에게 감겨버리는 이야기다.


스스로 정체를 밝히는 잠입 경찰 현수, 서로를 향해 점차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는 두 남자의 감정, 공권력과 범죄를 구분할 수 없이 모두가 불한당이 되어버린 혼란의 파국 등 지금까지 영화 <신세계> 같은 기존 언더커버 장르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설정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췄다.


"형, 나 경찰이야." 눈물 젖은 무구한 얼굴로 스스로 경찰임을 밝히는 현수. 범죄 조직 일인자 재호도 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 중심에는 두 사람의 실낱같은 감정선이 복잡한 층위를 이루며 촘촘하게 감겨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을 전부 꺼내 두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짜임새 있게 엮어가며 굵직한 장르적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그려낸다.


그래서 오히려 세세히 풀리지 못한 감정들은 더 짠하고 현실적이며 애달프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사랑이 아니다.


"착해서 그래. 너나 나 같은 놈들은 죽었다 깨나도 이해 못한다"


동료 병갑에게 현수를 설명하는 재호의 말처럼, 이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처음 보는 상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려가는 끌림에 대한 과감하고 매력적인 묘사에 가깝다.



영화에서는 누가 범죄자고 경찰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어둠의 중심부에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는지가 중요할 뿐.



시뻘건 피와 온갖 폭력으로 점철된 결투 장면도 어차피 재호와 현수가 공유하는 관계의 연장선이다. 엇나갈 만하면 튕겨 돌아오게 되는 이 강력한 끌림에 방해되는 걸림돌은 무참히 제거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액션 누아르의 삼박자, 믿음과 배신 그리고 복수의 화음은 실패했다.


현수를 향한 재호의 순애보 같은 농밀한 감정이 홀로 엇박자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서서히 번져가던 감정의 농도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폭주해버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뒤섞이고 말았다.


터질 듯 소란했던 감정은 동트는 새벽녘처럼 모든 것을 파랗게 물들이고 고요히 스며들었다.






순간에 묶여버린 영원



이 모든 것은 결국 "처음"이라는 반칙 때문이다.


"눈에 반했다"는 말은 모두가 믿지 않지만 모두가 믿는다. 이보다 더 말이 안 되는데 이해되는 감정이 어디 있겠는가.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찰나, 가장 어두운 대낮에 벌어지는 소동. 이 영화의 미술 연출도 아주 볼 만하다.



경찰과 불한당, 지상의 낮과 밤인 현수와 재호는 처음부터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교도소에서 출소 후 두 사람은 낮과 밤게 유일하게 허락된 새벽의 강렬한 총성이 된다.


한편 영화는 중간중간 재호가 회상하는 현수를 마치 연인을 떠올리는 듯한 연출로 보여준다.


현수의 해사한 얼굴에 집중된 기억, 마지막에 홀로 떠올리는 둘만의 대화 등은 그에게 현수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해준다.


영화의 전반을 이루는 피튀기는 액션과 배신 그리고 의혹은 재호와 현수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도 어쩔 수 없는 생존의 갈림길에서 결국 멀어지고 마는, 만남과 이별의 한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신나게 불꽃놀이 하는 깨발랄한 조폭 아저씨들... 타오르던 새벽은 여명이 밝아오면 잠시 파랗게 남아 있다가 사그라진다.



불한당의 삶은 한밤의 소란한 총성으로 활활 타오르지만 아침이 오면 초라하게 식어버리는 새벽의 불꽃놀이와도 같다.


수많은 새벽을 보내고 함께 맞이하는 아침.

첫새벽의 여명처럼 희미하게 정리되지 못한 감정은 적에게 절대 보여서는 안될 '뒤통수'처럼 위험하고 위태롭다.


가장 조용한 시각에 마주한 상대의 '뒤통수'는 우습도록 나약하다. 배신과 총칼이 난무하는 불한당의 세계에서 이것은 명백한 '실수'다.


이처럼 인생의 예상치 못한 실수들은 언젠가는 터져버려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후회를 남길 것이다.


예정된 비극을 알면서도 계속 모른 척하고 싶은 재호와, 몰랐던 진실을 서서히 알아가는 현수.


서로 마주보며 걸어왔던 두 사람은 결국 엇갈릴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짜... 진짜 뭐에 씌었나 보다. 그냥... 끝까지... 모르지 그랬어.


현수가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이상 예전처럼 함께할 수 없다는 상황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재호의 표정은 쓸쓸하고 공허하다.



한 번 빼앗긴 마음은 다시 돌려받을 수 없다.

그것을 현수에게 주어버린 재호는 영원의 새벽 속에 갇혀버렸다.



"믿는 놈을 조심하라, Be careful who You TRUST"

영화 포스터의 글귀는 서로를 향한 배신마저 엇갈린 재호와 현수를 나타내는 것 같다.



믿어서는 안되는 사람을 믿어버리게 되면, 그 시간 이후로 상대는 당신에게 유일한 아침이자 가장 긴 새벽이 되어버린다.






끝없이 추락하는 새벽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희미한 여명 아래 모든 인과 因果와 결말은 끝없는 새벽 속으로 추락한다.


이 푸르고 서글픈 추락을 재호의 '배신'으로 인한 현수의 '복수'로 단언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쏘아 올린 짙은 새벽의 총성에서 울려올 것이다.



아침으로부터 도망친 불한당의 새벽은 동트기 직전 가장 짙게 밝아온다.





모든 것이 끝나고 현수에게 재호가 남긴 새벽을 서서히 밀어내는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




이들의 새벽이 왜 이토록 짙었겠는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선택은 "감성 멜로"다.







"이야, 자기는 멍도 예쁘게 든다"

갑자기 자신의 방에 들어온 현수가 나가자마자 바로 거울을 보는 재호.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결정적인 힌트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원래 재호가 양성애자임을 암시하는 대사가 있었으나, 제작사의 반대로 삭제되었다고 한다. 변성현 감독은 이 영화의 각본을 쓸 때 일부러 로맨스 영화들을 틀어놓고 그 감성에 취해서 썼다고. 또한 재호 역의 설경구에게는 영화 <캐롤>처럼 첫눈에 반한 멜로 눈빛 연기를 지시했으며, 이 사실을 현수 역의 임시완은 전혀 모르게 했다고 한다. 또한 회장 삼촌까지 배신하고 재호 곁을 지키는 병갑을 연기한 김희원은, 자신이 재호를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시 보면 이 영화는 마치 재호-수-병갑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삼각관계로 보이기도 하며, 본인과 너무나도 달랐던 아름다운 청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한 남자의 안타까운 비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 불한당원 추천 영상

안예은 <파아란> : 싱어송라이터 안예은이 영화 <불한당>을 보고 작곡한 노래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이 곡을 소재로 한 불한당 테마 팬뮤비가 많이 있다.

그중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하는 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Q97zByOS-V4

"그런 일 없었으면 네가 지금 내 옆에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