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나이가 들수록 새로 만나는 누군가와 '그냥' 친해지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기가 어려운 것 같다. 수많은 인간관계는 이해관계에 불과하며 '나'와 '그들'의 경계가 명확해지는 느낌이 자주 든다. 이렇게 감정이 메말라가서인지 (사실 그냥 핑계일 수도 있지만) 독서는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도 잘 챙겨 보지 않게 되었는데 우연히 유튜브 추천 영상으로 보게 된 넷플릭스 드라마 <영 로열스>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길고 강한 여운을 남겼다.
드라마 <영 로열스>는 스웨덴 왕실을 배경으로 전통 명문 사립학교에서 벌어지는 십 대 청춘들의 이야기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감각적인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조화를 이루어 극의 몰입감을 높인다. 무엇보다 서서히 그러나 강렬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두 소년의 섬세한 감정선을 잘 담아내었다.
사실 내용은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다. 모든 것을 가진 채로 태어났지만 최선을 다해서 '평범'해지고 싶은 왕자가 왕궁을 나와 기숙학교에서 이런저런 험한 일들을 겪으며 자신과 '사랑' 그리고 세상을 알아가는 이야기. 하지만 세상 밖으로 이제 막 걸음을 뗀 왕자에게 후계자로서 대의와 소중한 사람 사이에서 내려야 하는 결정은 어렵고 버겁기만 하다. 그냥 그 애와 사귀면서 평범하게 지내면 안 되겠냐는 반항에 "넌 너무 어려. 나도 너처럼 사랑이 전부인 때가 있었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니?"라는 어머니의 훈계는 사실일까. 원래 사랑은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고재종, <첫사랑>) 깨닫고 마는 것일까.
'평범한' 첫사랑을 앓는 '평범하지 못한' 왕자의 성장통은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처럼 아리고 쓸쓸하다.
최악과 사랑의 순간은 언제나 동시에 찾아온다.
이 드라마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처음 겪어보는 아무리 부정해도 도돌이표인 감정에서 오는 대혼란, 상대에게 진심을 고백하는 순간의 떨리는 눈빛과 불안정한 호흡 등 첫사랑이 몰고 온 격동의 순간들을 섬세한 감정 연기로 세밀하게 표현한다. 이는 그들의 관계가 '소년과 소년'이라는 사실보다 그들이 보여주는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한 감정 ‘그 자체'에 몰입하게 한다.
"나랑 같이 있어 줄래?" "난 그냥, 너랑 같이 놀고 싶어." 이유 없는 끌림은 '그냥' 인정하고 가는 수밖에.
귀족과 평민의 사랑이라는 매우 고전적인 주제를 세련된 연출로 승화시킨 점이 주목할 만하다. 선과 악의 극명한 대립 대신 다층적으로 불안한 십 대들의 상황과 심리를 중심으로 갈등의 개연성을 강화시킨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왕자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묘사하는 위선적이거나 이기적인 왕자가 아니다. 이 어린 왕자(빌헬름)는 유약한 성품으로 주변을 대할 때 언제나 조심스럽다. 안전한 둥지를 벗어나 서툴게 하나 둘 세상을 배워가는 그에게서 사춘기 소년의 때 묻지 않은 풋풋함이 물씬 풍긴다.
왕실 부속 명문 사립학교를 배경으로 과도하게 화려한 장치나 소품 없이 오직 배우들의 연기와 조명, 사운드로 프레임을 꽉 채움으로써 각 인물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클로즈업 장면에서 배우들의 주근깨나 여드름 같은 피부 잡티가 보정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것 또한 현실적인 십 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강렬한 사운드와 이미지를 동반한 오프닝이 인상적이다. 배우가 카메라와 눈을 맞추는 참신한 프레임으로 시즌 전체의 시작과 끝을 여닫는다.
스웨덴 드라마 <영 로열스 Young Royals> 시즌 1은 주로 왕자 빌헬름의 시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된다. 한 국가의 왕위 계승자라는 왕관의 무게와 부담스러운 사회적 시선들에서 그를 가장 자신답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두고 괴로워하는 어린 왕자의 모습은 끝난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시즌 2가 작년 하반기부터 제작되고 있다고 하는데, 왕자 빌헬름의 사랑뿐만 아니라 왕실의 권위를 둘러싼 사회적인 루머나 세력 다툼 등 아직 완결되지 않은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기대가 된다.
모든 것이 엉망이라고 느낀 순간 눈에 띈, 작지만 단단하고 반짝이는 한 사람. 이 사랑의 힘은 언제까지 유효할 것이며 두 사람은 어디까지 함께 극복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괜히 이 청춘들의 서툴고 어린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