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은 나비넥타이 모양이다

수익은 계약 이후에도 흐른다

by 레보

마케팅을 처음 배울 때, 퍼널(funnel)이라는 개념을 배운다.


넓은 입구에서 잠재 고객이 들어오고, 점점 좁아지면서 최종적으로 계약이 이루어진다. 깔때기 모양.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단순한 그림이다. 직관적이고, 이해하기도 쉽다.

image.png 출처: https://www.typeform.com/blog/how-to-leverage-forms-at-every-stage-of-the-marketing-funnel

근데 레브옵스 일을 시작하고 나서 이 그림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퍼널은 계약에서 끝난다. 고객이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그림이 끝난다. 그다음은 없다.


현실은 달랐다. 계약이 끝이 아니었다.


레브옵스를 처음 맡았을 때, 뭐든 배워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Revenue Architecture라는 코스를 들었다. SaaS 비즈니스에서 수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구조적으로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는데, 그 코스를 만든 곳이 Winning by Design이라는 회사다.


거기서 처음 Bowtie Framework를 봤다.


나비넥타이 모양의 도형. 뭔가 머릿속에 딸깍 하고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생각했다. 이걸 언제 쓰나.


그 생각을 잊고 지내다가, 새 CRO가 합류하면서 buyer journey 얘기를 꺼낸 날이 있었다. 회사 비즈니스 라인이 여러 개고, 라인마다 고객의 출발점이 다르다고. 어떤 고객은 우리를 처음 접하는 거고, 어떤 고객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 여정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그 도형이었다.


쓰는 날이 왔구나.

image.png 출처: https://winningbydesign.com/resources/blog/the-saas-sales-method-2/

나비넥타이. 가운데가 좁고, 양쪽으로 펼쳐지는 모양.


왼쪽 삼각형은 기존 퍼널이다. 잠재 고객이 들어와서 계약으로 좁아지는 과정 — 마케팅과 영업이 담당하는 영역. 오른쪽 삼각형은 그다음이다. 계약한 고객이 계속 쓰고, 더 많이 쓰고, 주변에 추천하는 과정 — CS팀이 담당하는 영역.


그리고 가운데, 가장 좁은 지점이 계약이다.


기존 퍼널은 왼쪽 삼각형만 있었다. 오른쪽이 없었다. 고객을 데려오는 것만 생각하고, 데려온 고객이 계속 돈을 가져다주는 과정은 그림 밖에 있었던 거다.



image.png 출처: Winning by Design 의 Bowtie model 을 NotebookLM으로 정리한 인포그래픽


Winning by Design은 이걸 이렇게 표현한다. 왼쪽은 약속한 가치 (Value is Impact promised) 고, 오른쪽은 실현된 가치 (Impact is Value realized) 라고. 계약 전까지는 "우리가 이런 걸 해드릴 수 있어요"라고 약속하는 과정이고, 계약 이후는 그 약속이 실제로 지켜지는 과정이라는 거다. 많은 회사들이 약속하는 데는 공을 들이면서, 실현하는 쪽은 CS팀에 떠넘기고 잊어버린다.


B2B SaaS 비즈니스에서 고객이 계약을 맺는다고 끝이 아니다. 그 고객이 내년에도 갱신을 해야 하고, 더 많은 기능을 쓰면 업셀(upsell)이 일어나고, 만족한 고객이 다른 회사를 소개해주면 새로운 계약이 생긴다. 계약 이후에도 돈이 계속 들어오는 구조다.


기존 퍼널 모델로 보면 이 모든 게 보이지 않는다. 마케팅과 영업은 계약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고, CS는 그 뒤에서 조용히 고객을 붙잡고 있다. 두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


Bowtie는 이걸 하나로 연결한다. 고객을 데려오는 것과 고객을 유지하는 것이 같은 수익 시스템 안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CS팀이 레브옵스와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CS는 그냥 고객 불만을 처리하는 팀이 아니다. 수익이 계속 들어오게 하는 팀이다.


실무에서 이 프레임워크를 쓰면서 달라진 게 있었다. 마케팅과 영업이 새로운 계약에만 집중할 때, 갱신율이 얼마나 되는지, 업셀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같이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 파이프라인을 볼 때도 새로운 딜만 보는 게 아니라, 기존 고객에서 오는 확장 매출까지 한 화면에서 보기 시작했다.


퍼널에 오른쪽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레브옵스가 마케팅과 영업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가 바로 이거다. 고객이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수익 엔진이 멈추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다른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Bowtie는 그 전체 그림을 처음으로 보여준 프레임워크였다.


수익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가운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화에서는 그 수익 흐름을 실제로 담아야 했던 곳 — Salesforce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시스템을 도입하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현실은 조금 달랐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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