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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Jan 19. 2024

복잡하고 단순하게

2024년 1월 19일

1

충무로 역에 늘 상주하는 할머니가 한 분 계신다.

직장이 필동이라 거의 매일 할머니를 보게 된다. 머리가 희고, 허리는 기역자로 굽으셨다. 무척 마르셨고 옷은 누더기 같다. 청테이프로 둘둘 만 비닐봉지 같은 걸 대여섯개 정도 항상 가지고 다니신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음식일까, 생필품일까, 어쩌면 그보다 소중한 어떤 기억은 아닐까.

보통 계단이나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계신다. 얼굴이 시커멓고 머리도 엉망이지만 눈빛만은 매서우시다. 겁이 날 때도 있다. 전에 한 번은 어떤 여자분이 음료수를 건네다가 혼꾸녕이 났다. 원플러스원이라서 드리는 거라고 했는데 계속 역정을 내셨다. 왜 화가 나셨는지 모르겠다. 동정이 싫으신 걸까, 음료에 이상한 걸 탔다는 망상에 빠지신 걸까, 혹은 그저 화낼 이유가 필요하셨던 걸까. 내가 이해하지 못할 뿐,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일상에서도 그런 일이 숱하게 반복된다.

할머니에 대해 상사에게 물어보았다. 거기 계신지 못해도 십 년은 된 것 같다고 한다. 십 년이라. 십 년은 긴 세월이다. 세월은 항상 무언갈 증명한다. 할머니의 십 년은 무엇을 증명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우울해진다. 그러나 출근해서 바삐 일하다보면 금세 잊어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길에 또 다시 그런 생각을 반복한다. 어쩌면 우리는 벌써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두 번 다시 못본다고 해도 어쩌면 이미.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보았다. 4번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계셨다. 여느 때처럼 무심히 지나치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혼자서 허공을 향해 말하는 거였다.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 향했다. 이런 말이었다.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많이 지지 말어.”

그리고 또 이런 말이었다.

“사람은 장난감이 아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그래도 평소보다 조금은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래서 한 번 더 들을 수 있었다.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많이 지지 말어. 사람은 장난감이 아니다.”

4번 출구를 올라와서 한옥마을 쪽으로 걸었다. 며칠간 몹시 춥더니 날이 조금 풀렸다. 낮에는 기온이 9도까지 올랐다. 하지만 삼한사온이다. 목, 금, 토, 일까지 덜 춥지만, 월요일부터 다시 강추위가 예고되어 있다. 영상 9도에서 하루아침에 영하 12도까지 떨어진다. 이후로 삼일 동안은 대낮에도 기온이 영하권이란다. 나는 무슨 죽을 죄를 지었을까? 절망에 빠진 뒤에도 다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을까? 사람을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은 사람을 장난감으로 봐서 그런 걸까? 세월은 많은 걸 증명하는데, 나는 사십 년 가까운 오랜 세월동안 대체 무엇을 증명하고 있나? 아무튼 나는 겨울이 싫다. 추위도, 쓸쓸함도 지긋지긋하다. 빨리 봄이 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출근한다. 주말이 되어서 이틀은 출근을 안한다. 다행이다.


2

예전 일이다. 당시 만나던 사람의 소개로 매일 글쓰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독일에 사는 어떤 시인분의 프로젝트였다. 삼 주 정도 매일 글을 쓰고 메일로 발송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썼다. 그 이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딱히 억지로 쓰고 싶지도 않았고.

어쩌다 참여한 그 프로젝트가 큰 영향을 미쳤다. 매일 써보니 생각보다 더 좋았다. 마감에 쫓겨 쓴 글 중에 마음에 드는 글도 많았다. 무엇보다 매일 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자각이 컸다. 나 자신을 옭아매던 무언가가 풀어진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생 써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단한 걸 쓰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쓰는 행위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을 제대로 느꼈다. 좋은 경험이었다.

요즘 이래저래 복잡했다. 이럴 때일수록 단순한 해결책이 좋다. 그래서 오랜만에 매일 써볼까 한다. 내용은 일기일 수도 있고, 일기를 빙자한 소설일 수도 있고, 그냥 소설일 수도 있고. 딱히 정해두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쓰지 않으면 매일 쓰기 힘들다. 왜 쓰고 싶은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차차 알아가면 되겠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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