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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Feb 15. 2024

나와 나의 세상에게

2024년 2월 15일

지난 연말에 나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 자주 가는 글쓰기 모임의 이벤트였다. 당시에는 편지지에 손으로 써야해서 짧게 옮기고 말았지만 원본은(전날 미리 좀 썼다) 더 길었다. 오늘 어쩌다 우연히 그게 생각나서 다시 읽어봤다. 이 글을 쓰던 때의 감정이 떠올라 조금 슬펐다.




<나와 나의 세상에게>


내가 처음 편지를 쓴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야. 좋아하는 여자애 때문이었어. 늦은 밤,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지.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려서, 그 박동이 손가락을 타고 연필 끝으로 전해졌어. 덕분에 막 글자를 배운 아이처럼 글씨가 삐뚤빼뚤했지. ‘좋아해’ 라는 말을 크게 썼던 게 기억나. 내용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느끼하고, 유치했어. 어째서 그런 건 좀체 잊히지 않는지... 생각만해도 얼굴이 뜨거워지네. 물론 당시에는 유치한줄 전혀 몰랐어. 그런 건 다 지난 뒤에 알게 되지.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꼰대 같은 생각이 몇 개 있는데, 이것도 그런 것 중 하나야. 뭐든 지나고 나서야 제대로 알게 된다는 거. 모든 게 끝나고, 시간이 충분히 흐르고 나서야.


그래서 지금 현실이 의미가 없느냐? 오히려 반대지. 나중에 알게 될테니까 지금은 고민하지 말자. 그냥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덕분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 욕심 같은 걸 내려놓게 됐어. 아무튼... 편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나는 글을 쓰면 항상 이렇게 제멋대로 가버리더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그런 면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봐. 그렇지만 제멋대로 가는 듯 하면서도 결국 돌아갈 자리로 돌아가는 것도 나의 일면인 것 같아. 그러니 돌아가야겠지.


편지가 쓰고 싶었어. 얼마 전에 누군가의 편지글을 봤는데 너무 좋았거든. 그때 누구에게든 편지를 쓰고 싶었어. 하지만 생각해봐도 딱히 대상이 없더라. 그래서 미루고 미뤘는데... 결국 이렇게 쓰게 되네. 모든 게 좋은 사람들 덕분이야. 내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 말야. 인연은 참 신기해. 늘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날 이끌어 주니까. 나는 예전부터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확고한 주관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어. 그래서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는데, 아니라서 늘 아쉬웠지. 그렇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주관이라는 것도 결국 그 사람이 겪은 사람들의 총체가 아닐까. 왜 그런 당연한 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사람은 결국 혼자일 수 밖에 없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란 걸 말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글은, 나와 내 세상에게 쓰는 편지야.


종종 즐겁고, 종종 서운했던 모든 시간들아 안녕. 고맙고, 미안해.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은 왜 이렇게 잘 어울릴까? 그리고 왜 이렇게 항상 마음 깊은 곳을 울컥하게 만들까? 실은 편지를 쓰기 전에 딱 하나만 생각했어. 감상에 빠지지 말자. 그래서 처음부터 감상을 깨면서 시작하고 싶었어. 그렇지만... 결국 지금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유치하네. 아니면 새벽이라서 그런가? 새벽은 확실히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어. 그건 마법 같은 게 아니라, 단순히 피로 때문이 아닌가 싶어. 새벽에는 보통 피곤하고, 피곤하면 사람이 약해지고, 약해지면 감상에 빠지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나는 늘 약한 것에 눈길이 가는 사람인 걸. 어쩔 수 없지. 또 엄한 소리를 하고 있네. 그럼, 다시.


종종 즐겁고, 종종 서운했던 모든 시간들아 안녕. 고맙고, 미안해. 하지만 너는 나한테 하나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마음이란 건 억지로 증명하거나, 사과해야할 게 아냐. 어떤 마음이든 그저 그 마음 그대로 온전히 존재하면 좋겠어. 아무튼 나는 정말 고맙고 미안해. 잠깐이나마 나를 즐겁게 해주고, 충분히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런 마음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모든 게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이해해주면 좋겠어. 실은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있었는데,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야. 말했듯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버렸어. 미안해.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거야. 그때의 내겐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물론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야.


올해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내 인생은 한동안 무난한 정체기였는데 최근 몇 년은 무척 다이나믹했어. 그중에서도 올해가 정말 클라이막스지. 별의별 바람이 온갖 방향에서 나를 스치고 지나갔어. 나는 바람의 감촉을 느끼고, 냄새를 맡고,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보았어. 모든 순간을 일일이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하나의 덩어리로 마음에 남겨둘거야. 지나고 돌아보면 후회되는 순간은 늘 똑같아. 충분히 다정하지 못했던 거 말야. 왜 그정도밖에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 나는 다정함이 충만한 세상에 살고 싶어.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충분히 실천하지 못했어. 그런 점이 늘 아쉬워. 그렇지만 아마 아쉬움은 반복될 거야. 어찌됐든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내 욕심이 문제겠지. 너무 속편한 생각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게 충분한 힘이 있다면, 내 기억 속의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야지. 나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사람과 내 마음을 사정없이 할퀴었던 사람, 나를 스쳐간 시시하고 별볼일 없는 사람과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까지. 모두를 축복해야지. 모두가 자기 생각을 다정하게 말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기도해야지. 솔직히 말하면 난 태어나서 기도 따위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이게 다 아무 소용없는 소리라는 것도 잘 알아. 그렇지만 이런 편지를 쓰는 잠깐이나마 그런 꿈을 꿔보는 거야. 내 의식 속의 작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소박한 꿈이랄까. 아주 작은 온기라도 피워서 곁에 전해주고 싶어. 그러면 언젠가 나도 따뜻해질 수 있겠지? 나는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거 같으니까, 시간이 흐르는 것도 그런 면에서는 참 반가워. 앞으로도 쭉 작고 소박한 꿈을 꿀게.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유쾌하고 다정한 할아버지가 되도록 노력해볼게.

그래, 이제는 충분한 것 같아.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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