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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Dec 06. 2021

라면을 맛있게 끓일 수 있다면

가끔 인스턴트 라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뜨끈하고 매콤한 국물과 입안에서 헤엄치는 면발. 건강에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어 결국 먹게 되는 라면. 마치 담배와 같아서 누가 피우는(먹는) 모습을 보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서 종종 라면을 먹는다. 그렇게 라면을 먹은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주로 먹는 라면을 구비하고 있었다. 물론 신라면이 많았다. 삼양라면도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안성탕면을 먹었다. 당시엔 이유를 잘 몰랐지만 아마도 가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안성탕면이 메이저라면(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중에서는 가장 저렴하다. 맛도 좋다. 어릴 때 많이 먹은 탓인지 나는 지금도 안성탕면을 가장 좋아한다.


신라면은 너무 맵다. 맵찔이인 나는 신라면 정도의 맵기도 부담스럽다. 매운 걸 아예 못 먹는 건 아니지만 매운맛을 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물론 맛을 욕구하는 데 이유 따위가 있을 리 없지만... 매운 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사람도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되려 스트레스가 쌓인다. 입맛이 떨어질 정도다. 아우, 매워. 짜증 나.


안성탕면은 구수한 맛에 가깝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된장국을 베이스로 만든 라면 같다. 나는 그 구수한 맛이 참 좋다. 그리고 안성탕면은 계란이 정말 잘 어울린다. 신라면의 경우 계란을 넣으면 오히려 국물 맛을 해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안성탕면은 계란을 넣어서 먹으면 풍미가 더 좋다. 계란을 풀지 않고 덩어리째 끓여도 맛있고, 젓가락으로 죄다 풀어서 국물에 섞어도 맛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밥을 비벼 먹기도 딱 좋다.


물론 나의 취향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스무 살에 대학에 가면서 자취를 해보니, 모든 친구들이 신라면을 선호했다. 당시에 우리 집은 학교 앞 아지트 같은 곳이라서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왔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집에 라면만큼은 늘 준비해두었다(사 오는 친구들도 많았다). 물론 신라면이었다. 가끔 안성탕면도 준비해둔 적도 있었지만 결과는 늘 신통치 않았다. 혹시 라면 있어? 응, 신라면이랑 안성탕면 있는데 뭐 줄까? 신라면. 그래.

그즈음부터 신라면에 대한 나의 적응력이 높아졌다. 자꾸 먹다 보니 그쪽이 더 괜찮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점점 안성탕면보다 신라면을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놀러 오는 친구 중에는 여자애들도 많았다. 여자애들 여럿이 새벽까지 술을 먹다가 우리 집에 쳐들어오는 것이다. 그 애들은 잠시 자다가 일어나 라면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애들에게 종종 라면을 끓여주곤 했다. 물론 신라면으로.


당시의 나는 나름대로 라면 끓이기에 자부심이 있었다. 친구들이 너무 맛있다고, 평생 먹어본 라면 중에 가장 맛있다고 늘상 말했던 탓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치기어린 아이들의 과장된 표현일 뿐이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어렸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라면을 제일 잘 끓이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런 점을 의기양양하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나 여자애들에게 환심을 사는 용도로 잘 먹히는 줄 착각했다. 후후, 내가 끓인 라면을 먹으면 날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야. 후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어렸다. 아무튼 노하우는 물 조절이었다. 물의 양을 약간 모자란 듯 잡아야 라면이 맛있다. 물론 나를 사랑하게 만들 정도의 맛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서 여자애들이 올 때마다 라면을 끓여주고 칭찬을 듣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술에 취한 여자애들 몇몇이 놀러 왔는데, 이번엔 다른 친구도 있었다. 과에서 가장 잘생기고, 키도 크고, 매너도 좋고, 아무튼 간에 인기가 많은 남자애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친구를 경계했다. 딱히 그 친구에 대해 사적인 감정이 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 아무튼 남자들은 잘생긴 남자를 경계하는 법이다.


우리는 스무 살이 할 법한 수다를 나누다가 라면을 끓여먹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혼자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래, 내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보여주지. 깜짝 놀랄 거야, 아마. 후후후. 그러면서 라면을 끓이려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남자애가 나섰다. 잠자리 빼앗는 것도 민폐인데 집주인한테 라면까지 끓이게 할 수는 없지. 내가 할게. 어?... 그럴래?... 나도 모르게 남자애의 말에 수긍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희한하게도 인기가 많은 친구의 말은 어쩐지 영향력이 있다.


남자애는 신라면을 끓였다. 물론 맛이 좋았다. 여자애들은 내가 끓여줬을 때보다 훨씬 더 감탄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그의 라면 끓이는 실력을 찬양했다. 나도 먹어보니 확실히 맛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들 맛있다고 소리치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면발을 다 건져먹고 국물이 남아있으니 남자애가 말했다. 밥도 해줄까? 밥으로 뭘? 그런 게 있어.


그는 냄비에 든 국물을 조금만 남긴 뒤 밥을 넣고 참기름을 섞었다. 그리고 자글자글하게 볶았다. 작은 원룸 아지트 안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잠시 후 라면 볶음밥이 준비됐다. 우리는 수저로 그걸 한입 맛보고 기절했다. 아니, 기절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깜짝 놀란 것만은 사실이다. 너무 맛있었다. 그건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 음식은 처음 먹어보는데, 너무 맛있었다. 우리는 다들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 그렇지? 다른 라면은 안돼. 신라면만 간이 맞거든. 오호, 그렇구나! 그의 말투에 어쩐지 전문적인 연구원의 냄새가 풍겼다. 그래서 더더욱 멋져 보였다. 나도 이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잘생기고, 키가 크고, 매너가 좋고, 심지어 라면까지 잘 끓이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나의 완패였다. 그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맛있어서 냄비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아무튼간에 그때 이후로 나는 신라면에 대한 애정이 팍 식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신라면을 가장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살다 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그게 영원히 무언가를 바꾸어 버린다. 나는 결국 신라면을 좋아할 수 없는 운명이었나 보다. 지금도 아주 가끔, 신라면으로 그때 그 볶음밥을 해 먹기는 하지만... 집에 구비해놓는 라면은 늘 안성탕면이다. 안성탕면. 구수한 맛이 좋고 계란이 잘 어울리는 안성탕면.

아, 쓰다 보니 라면 땡기네. 물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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