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ichard Rhodes
(한국어판 제목: 원자 폭탄 만들기, 사이언스 북스)
“산업에 이용할 목적으로 대규모의 원자 에너지 방출, 원자 폭탄의 개발, 그리고 세계대전... 영국, 프랑스 그리고 아마 미국도 포함하여 중부 유럽에 위치한 강국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싸우는 세계대전...” - H.G. Wells 1권 25쪽
“이것은 인간이 핵에너지를 간접적 형태가 아닌 직접적인 형태로 방출하는 최초의 일이 될 것입니다” - 1권 372쪽
“수천 개의 태양의 휘황찬란함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이는 전능한 자의 광채와도 같으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1987년에 Richard Rhodes가 쓴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다룬 책입니다. 방대한 양의 자료와 저자의 글솜씨가 어우러져 어려운 물리학과 복잡한 현대사를 다루고 있지만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Pulitzer Prize, National Book Award, 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 등 여러 상을 받았고 과학자들과 평론가들 모두에게서 극찬을 받은 작품입니다.
책의 초반은 20세기 초에 있었던 원자 물리학의 성과와 책의 주제와 관련된 핵물리학의 소개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수준의 물리 지식이 있으면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또한 톰슨, 러더포드, 보어 등 당시 물리학자들을 모습을 통해서 과학 지식이 어떻게 쌓여가는지, 새로운 발견이 기존의 가설들을 어떻게 대체하면서 발전하는지에 대한 과학 철학에 관련된 논의가 이어집니다.
“‘물리학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러나 전쟁이 물리학자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해주었고 군사 기술을 포함한 기술 개발에 대한 과학의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해주었다. 그 후 정부와 개인 재단의 지원이 크게 증가했다.” - 1권 174-175쪽
문제는 이 시기가 세계 대전을 겪는 중이었다는 것이죠. 과학 교과서에서는 다루지 않는 내용이겠지만 당시 과학자들에게는 커다란 문제였을 겁니다. 책에서는 1차 대전에 사용되었던 생화학 무기 개발이나 폭약에 들어가는 재료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과학자들을 통해 그들이 과학 지식과 기술을 통해서 전쟁에 기여한 모습들을 소개합니다. 과학자들이 당시 사회의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런 모습이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어지지요.
“그는 호텔로 떠나기 전에 침대에 걸터앉아 흥분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분열에 관한 보어의 이야기를 들었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지?”” - 1권 337쪽
핵분열의 발견으로 주제가 넘어가면서 또한 시대적 상황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또한 핵분열의 연쇄 반응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챈 물리학자들 사이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이를 평화적인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 무기인 강력한 폭탄으로 사용할 것인지 말이죠. 보어의 경우 모든 국가에게 개방정책을 요구하면서 원자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고, 결국 각 나라의 과학자들이 조국의 운명을 두고 서로 경쟁합니다. 미국의 경우, 유명한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가 루스벨트에게 전해지면서 원자 에너지와 폭탄에 관한 연구, 즉 이 책의 주제인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한국어판으로 2권에서는 본격적인 맨해튼 프로젝트가 전개됩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험하는 것과 또 폭탄을 만드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요.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소위 물리학계의 ‘드림팀’이 모여 원자폭탄 설계와 제조가 시작됩니다. 핵 연쇄반응을 직접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는 일, 폭탄의 원료인 다량의 순수한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을 얻는 일, 그리고 폭탄 설계에 대한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놓고 논쟁하는 일들이 로스 알라모스에서 벌어집니다. 세계 대전이라는 상황과 나치 치하의 독일 과학자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 덕분에 프로젝트가 굉장히 급박하게 진행됩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개자식이다” - 케네스 베인브리지. 2권 339쪽
최초로 핵의 위력을 시험하는 트리니티를 통해서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확인하게 됩니다. 실험의 성공에 기뻐하는 한 편, 자신들이 발견한 자연의 엄청난 힘에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죠.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원자 폭탄 리틀보이가 태평양으로 이동합니다. 일본에게 마지막 항복을 권유하지만 거절당하자 폭탄 투하 시기와 장소를 놓고 고민하는 정치가와 군인들, 마지막까지 폭탄이 제대로 터질까, 잘못된 부품이 있는 건 아닐까 점검하는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모습과 함께 폭탄을 투하하기로 한 날짜가 점점 다가옵니다. 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강력한 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맡게 된 비행사들은 폭탄이 터진 후 주의사항을 듣고 리틀보이를 실은 비행기가 일본 히로시마로 떠납니다.
그리고 폭탄이 터집니다.
폭탄이 터진 히로시마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제가 읽어 본 책 중에서 가장 참혹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원폭 피해자들의 구두 진술이 몇 페이지에 걸쳐 나열됩니다. 지금까지 굉장히 긴장감 넘치게 전개되던 내용이 갑자기 멈추면서 ‘우리가 무엇을 한 거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개발했던 거지’라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저자의 필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입니다.
폭탄이 터진 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폭탄 연구의 성공에 기뻐하는 모습과 그 위력과 사용에 충격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이 공존합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저자는 오펜하이머의 말을 통해 이에 대한 생각을 간접적으로 전달합니다. 원자력과 같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인 경우, 이런 지식을 공유하면서 서로 간의 신뢰를 쌓아야 하고, 이를 모든 국가에게 개방하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일을 한 이유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당신이 과학자라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발견하는 것, 실체가 무엇인가 발견하는 일, 그것에 관한 지식과 가치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최선의 능력을 인류에게 넘겨주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원자 무기는 또 하나의 새로운 분야를 구성하여 필수 조건을 실현시키기 위한 새로운 기회를 줍니다... 그것들은...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변화입니다... 그들은 모두 같이 작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 서로 간의 상호작용만이 변화를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국제법을 만드는 일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호적인 감정을 갖는 것만이 단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 일들이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 2권 436-437쪽
저는 이 책을 한국어판으로 접했는데, 사실 번역도 아쉽고 책의 질도 좀 아쉽습니다. 문단도 제대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오자도 많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메시지를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원자/핵 물리학에 관한 지식과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배경과 이해는 물론이고,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자신의 발견에 대한 갈등을 겪는 과학자들의 모습과 함께,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통해서 과학 기술이 우리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해 주는 책입니다.
p.s. 이 책의 후속작(?)인 Dark Sun이 작년에 ‘수소폭탄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입수해서 조만간 읽어볼 계획입니다. 기회가 되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