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좀 자라 _ 육아일기 (D + 620일)

by 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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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과 우루과이의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이다. 아내가 곧 출산 예정일이고 언제 진통이 올지 모르기에 술을 마시면 안 되지만 맥주 한 캔 정도는 마셔도 된다고 결재가 떨어졌다. 월드컵 경기를 보며 시원한 맥주에 치킨을 뜯을 생각에 계속 설레었다. 더군다나 금요일인 내일은 사창립기념일로 연차휴가를 내지 않았는데도 쉬는 날이다. 늦게 자도 전혀 문제가 없다. 코코는 어린이집에 갈 테니 말이다.


저녁은 간단히 샐러드를 먹었고 월드컵 경기시간이 10시이기에 두 시간 일찍 치킨을 시켰다. 배달 어플에 있는 치킨집들 중 상당수가 주문이 너무 많아 메뉴를 품절로 바꾸어둔 상태였다. 다행히 주문을 마치고 코코를 목욕시켰다. 요즘 목욕할 때 우는 일이 거의 없어서 오늘도 기분 좋게 목욕을 끝냈다. 나도 씻고 나서 거실의 조명을 어둡게 했다. 아내는 코코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자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소파에 누웠다. 이제 8시 반.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 코코가 잘 테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오늘 코코는 자러 들어갈 때 내 벨트를 가지고 들어갔다. 가죽벨트를 버클에 넣었다가 빼며 한참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9시가 넘었는데도 계속 가지고 노는 게 오늘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9시 반. 코코가 잠투정을 하기 시작한다. 계속 체온계를 달라고 하고, 로션을 달라고 하고, 과자를 달라고 한다. 아빠를 부르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움직이면 코코가 흥분에서 더 잠들기 힘드므로 가만히 있었다.


10시. 한국과 우루과이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치킨은 식어가고 맥주는 차가워진 채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자는 척하다가 가끔 핸드폰을 열어 아직 0대 0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얼른 화면을 닫았다.


10시 15분. 아내도 인내심의 한계가 온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코코의 잠투정은 그치지 않았고 다시 아빠를 찾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가만히 있었겠지만 잠자러 들어간 지 두 시간 가까이 되어가는 상황에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나도 코코 옆으로 갔다. 코코는 계속 벨트와 로션병을 가지고 놀았고 나를 누우라고 했다가 앉으라고 했다가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짜증을 내기도 했다. 눈을 비비는 게 졸린 건 틀림없는데 자기가 싫은 것 같았다. '오늘 안 자는 날이구나.' 근데 왜 하필 오늘일까. 4년에 한 번 있는 월드컵을 하는 날인데 말이다.


11시. 전반이 끝나고 후반이 시작됐을 시간이다. 코코는 계속 잠투정을 부렸다. 소리를 지르며 내는 짜증에 인내심에 한계가 느껴졌다. 내 딸만 아니었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11시 15분. 갑자기 코코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눕는다. 숨소리가 점점 안정되더니 잠이 들기 시작한다. 아내와 나는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코가 자는 데 방해되는 벨트와, 물병, 쿠션, 인형을 침대 밖으로 치웠다. 오래 앉아있어서 그런지 일어나는 순간 내 다리에서 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철렁했지만 코코는 잠이 깨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최대한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고 무언의 함성을 질렀다.


나오자마자 축구를 틀었다. 후반 20분이 넘은 시간 아직 우루과이와 한국의 스코어는 0대 0이었다. 다행히 내가 코코를 재우는 동안 골이 들어가지 않았구나. 안도에 숨을 내쉬며 얼른 치킨을 데우고 맥주를 꺼내왔다. 아내는 탄산수로 나는 맥주로 건배를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축구를 봤다. 바삭한 치킨, 시원한 맥주와 월드컵. 소중한 시간이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좋은 경기내용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와 한국은 0대 0으로 비겼다. 코코를 재우느라 30분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나는 한국이 우루과이에게 질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에 맥주를 마시며 경기영상과 뉴스를 이래저래 챙겨보다가 좀 늦게 잠자리에 들어갔다. 다행히 코코는 그때까지 깨지 않았다.


뭔가 헛웃음이 난다. 육아를 하면 월드컵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구나. 시원한 치맥에 축구시청. 그렇게 큰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닌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코코를 원망하진 않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다. 그래도 육아를 하는 아빠니까 어쩔 수 없겠지. 다음 경기가 열리는 날엔 코코가 일찍 잠들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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