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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대로 Nov 26. 2024

기억과 자아상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관점에 따라 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우선 생물로서의 우리 몸이 가지는 유일한 삶의 목표는 단 두 가지, 생존과 번식이다. 우리가 생물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상, 당연히 우리 삶의 목표는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는 것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의 의식은 그렇게 생존과 번식 행위 자체를 노골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나의 생존 그리고 내 유전자의 번식 가능성을 높이는 모든 환경, 행동, 인간관계를 경험할 때 뇌가 도파민이나 옥시토신, 세로토닌 등등의 행복과 쾌감 호르몬으로 보상을 받을 뿐이다.


예를 들어 가족과의 사이가 돈독해지는 경험, 즉 가족과 따뜻한 식사를 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므로 그와 같은 경험을 할 때 내 뇌는 즐거운 감정을 보상으로 받는다. 매력적인 이성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그 이성과 내가 맺어져 번식의 확률을 높이므로 마찬가지로 내 뇌는 행복한 감정으로 보상 받는다. 낯선 곳을 여행을 하는 것은 내가 자원을 얻을 영토를 넓히고 내가 만날 짝의 범위를 넓히는 행위이므로 즐거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물론 낯선 곳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나 훌륭한 건축과 유적 자체에서 감탄을 느낄 수도 있으나 이 역시 깊고 긴 메커니즘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내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는 길과 만나게 된다.


반면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경험들이 있는데, 이는 대부분 나의 생존과 번식을 위협할 수 있다고 내 뇌가 판단하는 것들이다. 험상궂은 표정의 사람들 혹은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과의 경험은 불쾌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데, 그런 사람들과의 교류가 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고 나와 잠재적으로 맺어질 수 있는 다른 이성들에게 나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말을 퍼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낙후되고 지저분한 곳, 사람이 별로 없는 쓸쓸한 곳에 가면 허전하거나 지루한 감정을 느끼는데 이는 그런 환경이 위생이 좋지 않아 전염병 감염 확률을 높이고 갑작스럽게 누군가 나를 해치는 일이 있어도 보호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성을 만날 확률이 그만큼 낮은 점도 한 몫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존과 번식 확률을 높이거나 낮추는 환경과 행동, 인간관계 등의 경험은 모두 각자 개개인의 몸이 느끼는 것일 뿐, 현실과는 큰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과거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지구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약간이라도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생존과 번식 확률을 높이거나 낮춘다고 스스로 느끼는 경험들의 종류 역시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아무래도 같은 호모사피엔스 종이니만큼 극단적으로 다르기란 쉽지 않고 전반적인 경향성이 있다거나 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와 취향이란 게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누구나 더러운 음식보다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외모적으로 이목구비가 대칭에 신체가 건강한 이성을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취향이나 가치관에 있어 서로 다른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뭐가 됐든, 우리의 뇌는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한 감정이 드는 경험들을 일화 기억이라는 형태로 머리 속에 저장한다.일화 기억을 쉽게 말하면 드라마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저장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 여행의 세세한 부분을 전부 기억할 수 있냐고 물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행 중 있었던 일 중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떠오르는 기억들을 잘 살펴보면, 긴 여행 기간 중에서도 강렬하게 즐겁거나 행복했던 장면들을 기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몸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경험을 할 때 뇌 속에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좋은 감정을 일으키는데, 이 감정이 그 순간의 경험 내용과 주변 환경으로 부터 느끼는 다양한 시각 청각 촉각적 감각들, 그리고 그 경험과 관련된 다양한 생각을 조합해서 일화 기억으로 저장해 두는 것이다. 


한편 우리 뇌는 매우 불쾌하고 공포스럽거나 두려움이 느껴지는 순간의 경험도 일화 기억으로 저장한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하면 생존에 위협을 느낄 수 있어 그와 관련된 기억이 뚜렷하게 남을 수 있다. 폭력을 당한 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장면과 그 때 귀로 들린 것, 통증의 감각 등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우리 뇌가 그렇게 강렬한 부정적 감정이 느껴질 때의 경험을 박제화시켜 일화 기억으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렬한 감정의 도움을 받아 저장된 일화 기억들은 모여서 나라는 사람의 자아상이 된다. 내 머리 속에 저장된 일화 기억들에 나 스스로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 마치 어떤 이야기 속 주인공이 욕망을 추구하다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이겨내어 결말에 이르는 것처럼, 일화 기억들을 재구성해 나를 주인공으로 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 내가 구성한 이야기의 플롯이나 주제가 바로 내 삶의 의미가 된다. 


결과적으로 삶의 의미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삶의 의미란 결국 내 머리 속에 쌓인 일화 기억들로 내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와 같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낸 나의 이야기에 흥미가 없으면 그 순간 삶의 의미도 사라지는 셈이고, 내가 쌓은 일화 기억들이 계속 흥미를 유발한다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내 삶의 의미는 생명력을 얻게 된다. 


별다른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 머리 속에 기억할 만한 일화 기억이 남아 있지 않으면, 당연히 삶의 의미도 없고 인생이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또한 일화 기억들이 온통 부정적인 감정으로 비롯된 경험 기억들로 가득 차 있으면 자신의 자아상, 자신의 이야기, 그러니까 자기 삶의 의미 역시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도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의 머리 속에 저장된 자아상이 전부 생존의 위협을 강하게 느낀 어린 시절의 일화 기억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거나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느끼게 되면, 현실에서 강렬한 쾌감을 좇거나 남들과의 비교에서 내가 우월하다는 것을 느끼려고 하고 인정욕구에 중독되는 행동에 몰입하게 된다. 내가 만족할만한 자아상이 없으니 현재의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지기 쉽고, 그래서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금이라도 나를 채워줄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는 공부 경쟁에 비교 당하고 평가 받으며 마치 전쟁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기 쉬운 곳은,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남과 비교하고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 유독 한국인이 내적 만족보다 외적 만족과 외부 평가에 민감한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다. 그런데 외적 만족은 오랫동안 채우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말 그대로 나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우리가 느끼고 지각하는 것만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데 남의 평가, 남의 인정은 엄밀히 말해 나의 입장에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그렇게 좋게 봐준다고 내가 상상하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학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를 향해 찬사를 보낼 수 있지만 실은 돌아서면 그 사람의 존재를 까먹는다. 모든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나와 남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남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물리적으로 절대 알 수 없다는 진실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인생을 충만하게 살기 위해선, 즐겁고 행복한 감정과 연결된 일화 기억들을 최대한 차곡차곡 저장하고, 불쾌하고 두려운 감정과 연결된 일화 기억들이 저장되지 않는 방향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은 나의 생존과 번식 확률을 높인다고 내 몸이 판단하는 거라서, 어떤 경험들이 이런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는지 남에게 물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심지어 나와 유전자를 나눈 가족에게 물어서도 알 수 없는데, 쌍둥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인생을 살면서 감정을 느끼는 내 뇌의 회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좋은 레이더 탐지기가 있으니, 그게 바로 직감이다.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다보면 내 직감이 예리하게 갈고 닦일 수 있는데, 그렇게 발달한 내 직감은 생각보다 정확하다. 다만 그 이유를 의식적 생각으로 떠올리기 힘들 뿐이다. 어떤 환경이나 장소에 갔을 때 왠지 모르게 쎄한 기분이 들었다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그 곳은 나와 안맞는 곳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 때 잘은 모르지만 뭔가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그 사람들이 머무는 그 길이 내게 좋은 감정 경험을 제공해 줄 기회들이 많은 곳일 수 있다. 정확히는 그 길을 가봐야 알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한편으로 일단 내 마음이 불편하거나 영혼이 털리는 느낌, 불쾌한 느낌이 드는 장소나 일, 진로나 사람은 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자아상이나 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망가뜨리기 싫다면 말이다. 아무리 물질적 보상이나 현실적 기회가 좋다 해도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만 불러 일으키는 방향으로 가면 결국 삶은 공허해지고 인생 전체가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결국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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