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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Aug 12. 2021

재난지원금에 관한 소고

빈곤한 철학, 그 자리에 남은 기득권의 관성

작년   국민 대상 1 지원 이후,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쟁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국민 보편 지급,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이럴  국가가 돈을  써야 한다는 집권 여당과 선별 지급,  어려운 사람에게, 이럴 때일수록 국가가 돈을 아껴 한다는 기획재정부 간의 대립.  줄로 요약하면 "보편 vs. 선별" 구도로 정리할  한데, 여기에 항상 옳은 하나의 정답이란 있을 수 없다. 상황에 따라  국민 대상 보편 지급이 나을 수도,   피해를 입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선별 지급이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편적인 보편/선별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 특정 정책을 선택하는지 - 보편이라면  보편이며, 선별이라면  선별인지 -  대한 고민과 성찰, 그리고 합의이다.


 정책 핵심 메세지를 정리해보자. 우선 선별 지급 주장 근간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있다.  많은 피해를 입은 집단에 우선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을 하는  옳다는 주장이다. 모두가 거리두기와 방역수칙을 준수해서 얻는 혜택은 (100퍼센트 균등하다고는   없을지라도)  편차가 크지 않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손실은 그렇지 않다. 공무원이나 사무직 회사원과 소상공인  자영업자  피해의 양과 질이 같을 수는 없다. 한정적인 예산을 감안하여 피해가 크지 않은 그룹이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나가는 기업 또는 부유층을 지원하는 대신 생계를 위협받고 지원금이  절실한 집단에게 선별적 지원을 하자는 것이다.


반대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지원금을 지급하자는 주장의 정당성은 대략  가지 측면에서 마련된다. 먼저 현재의 코로나 팬데믹은 전대미문의 재난 상황으로 간주해야 하고, 그런 위기 상황에서 오랜 기간 방역수칙을 지키며 고생해  국민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국민 대상 보편 지급이 마땅하다는 .  경우 재난지원금은 '위로금' 성격을 띠고 있다.  번째로는 소비 진작이다. 1 재난지원금 때처럼 특정 지역이나 가게에서만   있도록 제한을 두어 '돈이 돌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는 소상공인들에게도 선별 지원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소상공인에게 집중적인 지원을 한다 하더라도 임대료를 메꾸는 수준에 지나지 않으며, 외려  국민에게 지급된 보편적 재난지원금이 지역사회에서 소비될 때 그들에게도   이익이 발생한다. 국민들은 소비할  있는 여력이 생겨 좋고, 자영업에도 선별 지급보다   도움이 되며, 국가 경제에도 활력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양측이 공유하고 있는 관점이 있다면 "피해를 입은 집단 실질적인 지원이   있도록 해야 한다" 방향성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관건은 보편 혹은 선별이라는 지원 방식 자체보다는 '소상공인  피해집중 룹 대상 지원 시 어떤 정책이 더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인가'이다. 여기서 논점을 소상공인 지원으로 단순화해도  왜곡은 없을  으니, 질문을 바꿔보자. "소상공인 직접 지원 (선별) vs.  국민 지급을 통한 소상공인 간접 지원 +  국민 위로금 (보편 어느 쪽이  효과적인가?" 여기에 가용 예산의 규모와  정책 시행  예상되는 행정비용  시간(예를 들어, 이번 5 선별 지급  88% 선을 가르기 위한 증빙, 확인, 지급 등의 행정 절차  비용, 그리고 보편 지급과 비교하여 실제 지급까지 더 필요한 시간 )을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정책의 효과성이 아닌 '지원 대상을  % 자를 것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재난지원금이라는 주제가 작년 총선과 올해 재보선이라는 '선거' 거치며 거대한 정치 이슈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지난 1~4 지원을 통해 나타난 경제효과와 관련하여 현재까지 발표된 모든 통계가 더 나은 정책을 위해 활용되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으로만 이용되어왔다. 모두에게 인정 받는 권위 있는 자료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든 레퍼런스 객관성을 담보할  없게  데에는 수치로 표현된 소위 '경제효과'라는 것에 대한 의문 - 해당 정책 하나의 효과만으로   있는가 혹은 통계로 장난을 치는 건 아닌가 등 -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정치적 공방의 책임이 크며 정부와 정치권, 언론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여당이  주장하는 재난지원금 보편 지급이란, 솔직히 말해 보자. '매표' 노리지 않았다고   있는가? 지지세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나보편 지급이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 면에서든 국가 경제의 선순환 면에서든 실제로 낫다 한들, 과연 어떤 철학이나 민을 위한 진정성 있는 마음이 담겨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지난  재보선을 앞두고 표에 도움 되려면 가급적 선거에 가까워졌을   국민에게 지급하는  낫다는 의원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국민들이 기대하는 책임감 있는 집권 여당의 자세는 재난지원금의 효과가 의도한 대로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결과를 바탕으로   나은 정책 수립이 아닐까.


야당은, 일단 존재감 자체가 없다. 야당의 목소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여타 이슈들과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주장에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본다는 기조에 따른다면 재난 지원 자체를 반대하거나 최소한의 지급을 주장해야 마땅하나, 전례 없는 팬데믹이 기약 없이 늘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차기 집권을 목표로 한다는 공당이 힘든 국민들을 위한 지원금에 무작정 반기를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니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 어렵고, 괜히 나서다 스텝이 꼬이는 대신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 내부적 합의가 되어 있는  아닐까 싶다. 사실 재난지원금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의문인데, 어쩌면 주든  주든 관심 없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여당 좋은 일이고 당장 자신들의 생계와는 관계 없으니까. 그래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여당과 기재부의 대립구도에서 슬쩍 빠지는 스탠스를 해온 게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정치권의 이런 행태야 늘 보던 그대로다. 영혼 없이 허울 좋은 명분만 찾는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내가 정말 흥미롭게 지켜봤던 건 기획재정부의 태도다. 바이러스의 창궐로 막대한 물리적, 정신적 손실을 입은 사람들의 피해 구제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대신 '어쨌든 최대한 돈을  쓰겠다'라는 가치관을 금과옥조로, 아니 신성불가침 수준으로 여기는 완고한 입장을 1 넘게 유지하고 있다. 궁금해졌다. 기재부는  저러는 걸까?


재난지원금 논의의 핵심이 소상공인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라면, 정말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효과를 내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위한 예산을 책정하고, 최대한의 효과를   있을 만큼 돈을 풀어야  것이다. 예산 규모에 알맞게 충분한 지원이 가능하다면야 모두가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중요한  지원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용 예산의 범위를 초과하지 않는 것인가? 둘 다 중요하지만, 기재부에겐 두 번째가 더 우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가용범위'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의하는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바이러스의 창궐에 맞서 평시처럼 예산을 집행할 것인가, 아니면 추가적인 지출과 재정 압박을 감수하고서라도 필요한 지원을 할 것인가?


이제부터는 철학의 문제다. 기재부의 기본 철학은 - 이것도 철학으로 쳐줄 수 있다면 - 국가 재정은 일단 아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쓰지 않겠다는 기조나 선별 지급 주장 자체를 문제삼으려는  아니다안정적인 국가 재정 운용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이유, 애초에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번쯤 고민해봄직 하다.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아끼는가?


평상시 재정의 안정적 운용은 위급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며, 필요할  부족함 없이 사용하기 위해서다. 국가와 국민이 위기에 처했을  재정을 확대하지 않으면 언제  것인가? 물론 지금보다  악화될  있는 가능성을 대비해야 할 필요도 있다. IMF 겪은 경험이 이런 보수적인 태도를  강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도 위기가 어디 흔하던가? IMF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사람을 살리고자 한다면 말 그대로 우선 려놓고 봐야 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국민이 쓰러지지 않도록 옆에서 버텨주는 게 국가의 존재 이유이며,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돈을  쓰거나  쓰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이렇게 재정과 예산을 넘어 국가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 철학은 없고 숫자와 관성만 있다. 선별 지급이 정말 효율적이라면 지금까지의 선별 지급이 가져온 결과와 앞으로 예상되는 효과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주장과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텐데, 그러기는 커녕 국가 재정과 예산 수치만 들먹이며 무조건  ,  이상은   없어, 라고 외치는 모습이 답답하기만 하다.


기재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원인은 부처 설립 이래 강화된 역사적 관성과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의 고질적 병폐의 화학적 작용 결과라   있다. 기획재정부는  그대로 '기획' '재정' 담당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정부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을 먼저 하고 그에 맞는 재정정책을 수립하여 집행해야 하지 않을까? 왜 기획은 하지 않고 재정만 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 이유를 역사적 연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재부는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나뉘어 있던 기능을 이명박 정부  통합하면서 탄생하였다. 역사적으로 둘은 이름을 바꿔가며 때로는 쪼개지고 때로는 합쳐져 왔는데, 처음 출발은 대한민국 정부 초기의 재무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 여기서 '기획'이란, 정부 정책의 전반적인 틀을 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부 재정, 정확하게는 예산 운용에 한정된다고 봐야 한다.


말하자면 오랜 세월 세금을 걷고,  안에서 예산을 짜고, 계획대로 쓰는 일을 해온 것이다.  나라의 재정 운용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오차 없이  맞아 떨어질  만무하니, 결과는   하나다. 남거나 혹은 부족하거나. 남는 것도 문제지만 부족한 것은 (특히 서슬퍼런 군사 독재 시기에는) 죄악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남으면 콘크리트에 때려박을 수라도 있지만 부족하면 답도 없다. 애초에 세금을 적게 걷었거나, 예산을 잘못 짰거나, 과다 지출을  것이니까. 감히 나랏돈을 낭비해? 뭐가 됐든 누군가는 예산을 초과한  대한 '책임' 져야 했을 테다. , 책임! 공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공무원들은 대개 무언가를 새로 만들거나 바꾸어서 ' 하기'보다는 눈앞에 닥친 상황을 ' 피해가기' 위해 움직인다. 비단 기재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공무원사회에 널리 만연한 폐단이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판사들이 항상 판례에 의존하듯 공무원들은 항상 전례를 찾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로운 재정정책이나 참신한 예산 집행을 상상할  있을까. 예전에는 어떻게 했지? 비슷한 사례 가져와 , 없어? 그럼 미국이나 유럽 케이스 뒤져. ? 책임지지 않기 위해.


 시간을 거치며 재정과 예산을 다루는 공무원들의 DNA에는 보수적인 사고 방식이 새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 '기획'이란  한다 해도 해왔던 , 해본 , 서류상 남아 있는 , 그리고  모든 것의 적당한 '응용' 정도가 그들의 세계관 안에 가능한 선택지로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철저하게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서 공무원들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소위 해외 '선진국'에서조차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다. 사스나 메르스가 있지만 발생 정도나 범위, 피해 규모, 지속기간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다. 그렇다고 100  스페인 독감이나 중세 유럽의 페스트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21세기 세계화와 자본주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바이러스의 대규모 창궐에 적절한 재정 운용 사례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기획'이란  하려면 - 그것이 단순히 예산을 책정하고 지출하는 숫자놀음일지라도 - 평소 '철학' 있어야 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재난 상황에서 재정과 예산을 총괄하는 부처 역할은 무엇인가, 국민의 어떤 부분을 채워주고 보호막을 어디에 어떻게 쳐야 하는가 등에 대한 고민을 해왔어야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성찰을 토대로  재정 운용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에 준하여 정책을 구상하고 예산을 '기획'  있었을 것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출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다음이다. 정책은 좋은데 재정  무리가 있다면  것인가  것인가, 한다면 그리고 아니라면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평소 가지고 있던 철학에서 나온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그저 재정에 빵꾸가  것인가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모습만 보인다. 철학의 부재, 그 빈 자리에는 재정과 예산 운용의 독점적 지위 유지를 위한 기득권의 반발과 '경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최고라는 비뚤어진 엘리트의식만이 남았다.


디테일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장기간 유사한 프레임 안에서 반복되는 논쟁을 지켜본다는 자체만으로 충분히 피곤한 일인데, 1년이 넘게  다섯 번의 지원을 하는 동안 재난 상황 대처와 그를 위한 재정 운용에 있어  어떤 깊이 있는 철학을 찾아볼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공허한 논리의 향연 대신 진정성 있는 고민과 성찰을 만날  있기를, 무더위를 꺾어줄 시원한 바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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