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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Sep 19. 2021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기

지적 허영에 관하여

10년 정도 된 것 같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영하 10도가 넘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 당시에는 다른 이름이었던 것 같지만 요즘에는 암흑카페라고 부른다는 공간에 방문했다. 말그대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체험을 해볼 수 있는, 당시에는 이색적인 데이트 장소로 입소문이 나던 곳이었다. 시각장애인 분들이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데, 이들의 안내에 따라 이것저것 만져보고 음식도 먹어보며 앞이 안 보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잠시나마 느껴보고, 시각 부재 상태에서 다른 감각을 깨워 보기도 하는, 그런 새롭고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시간대별로 정해진 인원이 팀을 이뤄 일종의 ‘코스’를 돌고 나오면 가이드 분이 소감을 묻는다. 어디서 오셨냐, 무얼 하시냐, 학생이시냐 등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요즘 감성으로 보면 초면에 너무 TMI 아닌가 싶을지 모르겠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질문이기도 했고, 더군다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만나 이제 밖으로 나가면 얼굴도 모른 채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임시 그룹이었기에 딱히 문제될 것도 없었다.


다른 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심지어 암흑 속에서 무언가를 먹는 경험을 해본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음에도 그 메뉴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 아마도 파스타였던 것 같다 – 이 날의 순간 중 유일하게 뚜렷한 것은, “요즘 무슨 책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이 대체 왜,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살짝 당황하여 멈칫하였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르겠다. “잘난 척 쩔었네 ㅋㅋ”. 그렇다. 굳이 폴 크루그먼의 책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한 에세이나 소설의 제목을 대는 것이 그런 자리에서는 무난했을 테다. 하지만 내가 그 시기에 여러 권의 책을 읽었으면서 ‘하필’ 그 책을 꼽은 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유학 준비 중이어서 공부에 여념이 없었고, 시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텍스트 – 수험서를 제외한 사실상 모든 책 – 는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의 저서가 내 방 책장에 꽂혀 있었고, 강렬한 빨강을 표지색으로 삼은 그 책이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나는 잘난 척을 한 게 아닌 건가? 그렇지 않다. 실제로 그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책의 날’ 웹사이트에 따르면, 책을 읽지 않고도 읽은 척 한 적이 있냐는 설문에 (응답한 영국 독자 중) 6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다. 영국 가디언의 2013년 조사(The top 10 books people claim to read but haven't)에서는 조지 오웰의 ‘1984’가 안 읽고도 읽은 척 하는 책 1위를 차지했으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 그 뒤를 이었다. ‘1984’는 예전에 한국인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했던 기억이 있는데, 출처를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찾을 수 없었다.


한때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노선을 취했다. ‘1984’라는 소설에 대해 내가 아는 건 파시즘과 전체주의 풍자, 빅브라더가 통치하는 디스토피아, 그리고 유명한 애플의 슈퍼볼 광고 정도였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일단 조지 오웰의 가장 유명한 저작이 대화 주제로 떠오를 일은 굉장히 드문 데다, 설령 그렇다 해도 다른 이들 역시 대부분 나와 비슷한 처지이며 내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굳이 나서서 아는 척 하지는 않더라도 어쩌다 귀에 들리면 “아, 그거?”라며 한 마디 살짝 걸칠 수 있는 수준만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2017년쯤이었던가, 이 책을 실제로 읽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꼭 읽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고 그 누구도 나에게 강제하지 않았지만, 그냥 읽어보고 싶어졌고 정말 한 번쯤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1984’란 책은 어떤 지적 수준의 척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마음 한 켠에 늘 견지하고 있던 ‘아는 척’, 정확하게는 ‘모르는 것처럼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지적 허영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안 읽었다면 안 읽었다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런 당당한 태도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디 가서 꿇리고 싶지는 않다면 실제로 읽어버리자! 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딱히 어디 가서 알은 체를 하거나, 나는 이 책을 실제로 읽은 사람이야, 라는 되도 않는 부심을 부리려던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1984’가 그어놓은 지적 척도, 허공에 세워진 그 장대를 실제로 뛰어넘어보고 싶었다.


설문조사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더라도 주변에 그런 책이 꽤 많다. ‘읽은 척’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는 척’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책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그 유명한 서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공통점이 있다면 최소 50년에서 100년 이상 된 고전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어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아는 척’의 필요성은 나이와 성별과 국적을 막론하고 인간이란 존재를 관통하는 것 같다. 이런 인식은 비단 책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어서 그 책을 쓴 작가는 물론, 화가와 그들의 그림, 음악과 작곡가 등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있으니, 이 시대에 소위 ‘클래식’이 갖는 가치란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지적 허영과 문화적 우월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를 읽은 척 했던 그날, 나의 진짜 기저심리는 당시 막 뜨고 있던 유명 해외 경제학자와 그의 최신 저작을 알고 있음을 어필하려는 마음보다는, “최근에 읽은 책이 없어서…” 라며 말꼬리를 흐리고 싶지 않다는 자기방어에 더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도 ‘책을 읽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 긴박한 순간에 나의 뇌가 당시 반복적으로 주입된 시각적 자극 – 책장에 꽂혀 있던 두꺼운 빨간색 책 – 을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어찌 보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정말 재미있던 건 책 제목을 들은 반대편 누군가의 반응이었다. 1) 아 그거, 라는 혼잣말, 2) 그거 알아? 라는 여자친구(로 추정되는 옆사람)의 목소리, 3) 응 재밌어, 라는 대답. 나중에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가 나와 비슷한 종자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처럼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으나 ‘굳이’ 리액션을 통해 자신 역시 그 책을 알고 그 책을 읽었다는 걸 표출해야만 했으리라. 어차피 잠시 후 그 공간을 나서는 순간, 그 말을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시간이 지난 뒤 그 상황을 떠올리며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두 바보가 누가누가 더 멍청한가 대결하는 건가? 그저 내 직감과는 달리 그는 실제로 읽었기를.


아, 그리고 나는 그 책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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