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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Nov 10. 2021

쉬지 못하는 사람들

휴식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9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약 한 달 가량의 시간 동안 여러 데드라인이 많았다. 하나를 하면 일정에 맞춰 다른 하나를 제출해야 했고, 그 다른 하나를 마치고 나면 또 새로운 마감 또는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또 다음, 또 다음. 일이 많고 바빠서, 라기보다는 내가 그런 상황에 나를 몰아넣었다, 라고 보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리고 그 데드라인들이 일단락된 지금 나는 약간의 후유증에 시달린다. 늘 많은 일을 마치고 한숨 돌릴 때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이다. 이 문장 역시 조금 더 바르게 고쳐보자면 나 자신을 내버려두지 못한다, 고 해야겠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가만히 있는 게 그냥 잘 안 된다. 늘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 물론 그럴 때도 간혹 없잖아 있지만 - 가만 있는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색하고, 이상하며, 마치 내가 시간을 잘못 쓰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요즘처럼 정신 없이 데드라인들을 지나오며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시기라면 그냥 편하게 늘어져 있어도 되고, 근처 영화관에 슬슬 가서 여유를 부려봐도 좋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카페에 앉아 가벼운 책을 읽어도 괜찮을 텐데, 잘 그러지 못한다. 약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 같아서다. 이는 나의 하루가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오랜 강박관념 덕분인데, 시간을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으로 보낸다는 느낌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그렇다고 내가 실제로 보내는 시간이 항상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가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대관절 그 '의미'라는 것에 어떻게 해야 진정성을 부여할 수 있는지는 잠시 밀어두더라도 말이다.


언젠가부터 내 취미활동 대부분이 이렇게 변해버렸다. 운동만 빼고. 운동은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스포츠라면 다 좋아했고 여전히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라 하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운동은 체력을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내가 하는 일이나 공부를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영역에서 나는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취미를 죽여버렸다. 취향도 함께 사라졌다. 모두 내 손으로 벌인 일이었다. 나는 한정된 시간을 잘 써야 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항상 그렇게 엄한 잣대를 들이댔다. 이 다음에는 저거, 다음에는 그거,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무엇, 다음 단계를 항상 고민하고 의식하고 준비하는 삶을 지긋지긋, 정말 지긋지긋해하면서도 그런 패턴을 완벽하게 체화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강박의 정도가 조금은 덜하다는 것이다. 나의 강박을 충분히 인지하게 된 이후로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익숙해지려 꾸준히 노력해 온 덕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쉽지 않다. 요즘은 다른 의미로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한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일이 없으니 이럴 때 열심히 글을 써야 한다, 무언가 해야만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월말에 있을 강의자료를 미리 준비해야 할까, 아니면 메모장에 적어 둔 자잘한 일들을 지금 처리해야 할까, 그 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뤄두었던 일들을 이제 해야만 할까, 책을 읽는 건 어떨까, 밀린 책이 많다, 시사잡지는 또 어떤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꽂아둔 게 몇 권인지 셀 수도 없다. 아이패드 케이스를 사야 하는데 뭔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케이스 뒷면이 불투명인지 반투명인지 투명인지, 애플펜슬 보관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스마트 커버는 일체형이 나을지 분리형이 편할지, 아예 스마트커버가 없는 건 어떨지.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잠깐, 강박의 정도가 예전보다 덜하다고?


데드라인이 지나고 11월 초 일주일 정도는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보상'으로서의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 스스로 '정의'한 휴식은 수용 가능하다. 내가 지금껏 이만큼 해왔으니, 그래 이 정도는 쉬어 주자! 그러나 보상으로서의 휴식을 넘어 일상에서의 쉼은 여전히 어렵다. 늘 여유 있는 삶을 갈망하면서도 막상 여유가 주어지면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휴식조차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사람, 아 그게 바로 나란 사람! ㅠㅠ


그래서 가끔은 몸이 아파야 '쉰다'. 몸이 시그널을 보내는 것 같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쉬지 않으니까. 육체가 바삐 돌아다닌다는 의미라기보다 정신적인 면에서 그러하다. 계속 무언가를 하려고 하니까, 더 정확하게는 다음에 해야 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으니까. 때로는 왜 하는지도 모르고 나 자신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관성적으로 행동하는 - 혹은 행동하지 않는 -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단지 무언가 하고 있다는 그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야 그 강박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처음 빈 페이지에 이 글을 적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정말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풀어보자는 정도였는데 한참 쓰다 보니 문득, 쉴 때는 확실히 내려놓고 쉰다는 것이 나에게만 이렇게 어려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제법 많지 않을까? 어쩌면 늘 무언가에 쫓기는 현대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지 내가 다소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는, 뭐 그 정도 차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퇴근 후 혹은 주말에 일을 놓지 못하거나, 물리적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지 않아도 머릿속 한구석에서 업무를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개인적으로 카톡을 업무용으로 쓰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입법은 다소 지나친 측면이 있으니 카카오에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줬으면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가만히 한량처럼 지내는 걸 너그럽게 두고보지 못하는 사회적 인식이 아닌가 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쉼을 쉼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보내는 시간의 질(=생산성)이 곧 나의 가치를 증명한다는 명제가 뿌리깊게 내재화되어있기 때문인데, 이건 바쁨이 곧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의 척도를 나타낸다고 여기는 사회적 인식과 분위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바쁘지 않다는 건 무능력하거나 게으르다는 뜻이다. 뭐라도 더 배우고, 하나라도 더 경험과 경력을 쌓아서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나은 삶 - 과연 무엇이 더 나은 삶인가? - 을 '쟁취'해야 하는 이 치열하고 삭막한 경쟁사회에서, 여가시간을 오롯이 즐긴다는 건 곧 도태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 문제는 비단 일부 사람들의 퇴근시간 이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삶 전반으로 확장된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터를 옮겨다닌다. 사람이 싫어서, 받는 돈이 적어서, 조직 문화에 적응을 못해서, 더 나은 기회를 찾아서, 워라밸을 위해서.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직과 전직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확연히 늘어났다. 일과 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 시간, 우리는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지난 삶을 돌이켜 보고, 걸어온 길을 점검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건강한 재충전의 시간을 향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섣부른 퇴사를 후회하거나 앞으로의 불확실한 미래를 직면한 채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가.


퇴직을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는 정년퇴직 이후 고립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에 익숙하다. 아, 은퇴하면 좀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삶은 우리를 오랜 관성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평생을 일터에서 보내며 직장에서의 시간과 직급, 연봉으로 자신의 가치를 양적 측정해왔던 세월의 반작용으로 남은 것은 아름답고 여유로운 인생의 제 2막 (혹은 3막) 대신 회사 밖에서 보내는 '비생산적'인 시간과 나라는 사람이 '무쓸모'하고 가치 없게만 느껴지는 허무감 뿐이다. 통상 우리 아버지 세대인 중년 이상 남성이 느끼는 외로움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 피하기 힘든 미래 감정일지 모른다. 


그러하다면 우리 삶에 진정한 자유란 가능한가? 하루아침에 삶과 사회가 부여한 관성을 깨뜨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회경제적 자유가 어느 날 나무 위에서 떨어지기만을 기대할 수도 없다. 연습이 필요하다. 잘 쉬는 연습, 쉴 때는 쉬는 데만 집중하는 연습, 풀어지고 늘어지는 순간만이라도 '다음'이나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연습. 그렇게 때로는 기꺼이 베짱이가 될 수도 있어야겠다.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따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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