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가 들어있네
요즘 몸 쓰는 일만 하고 있어서 그런가 먹는 것들에 특히나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노동주라고 좋은 의미일지 나쁜 의미일지 모르는 그 표현이 느껴지는 술을 마신다.
먹는 것들이 주는 즐거움과 위안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특히 몸 쓰는 일을 할 때 더욱 그 가치가 극대화되는 것 같다.
몸 쓰는 일이라 함은 여러 종류 일 텐데 내가 하는 몸 쓰는 일은 어떤 프로세스에 내 몸이 들어가 정확하게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1분 1초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그런 상태의 일을 말한다.
이런 일을 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 할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일을 하는지 그게 상당히 궁금하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진 않았다.
아마도 반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일한다고 할 것 같으니 답변의 반은 알고 있는 것 같아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 같은 경우는 일을 하러 갈 때 주제를 하나 정한다.
그래서 그 주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해 낸다.
매번 이렇게 생각하고 일이 시작되면, 다른 생각들은 못하게 된다.
어떤 상태와 비슷한지 생각해 보면 내가 러닝을 할 때의 상태, 조깅이 아닌 러닝, 이나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상태가 된다.
힘들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을 해보려 해도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는 게,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개입이 되어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면 몸이 적응해서 일을 아주 조금 수월하게 하는 정도에서 그런 상황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또 다른 일이 들어와서 그런 상황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런 상황들이 되풀이되면서 이상황에 적응이 되면 그때야 말로 제대로 된 노동이라고 생각된다.
바로 전 단계까지는 진정한 노동을 하기 위한 전초단계인 것 같다.
전초단계와 제대로 된 노동의 단계를 오갈 때 다른 생각이 개입이 되는 것 같다.
내게 어제 그런 일이 생겼다.
사실, 전날에 일 끝나면 꼭 자장면에 소주를 마셔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여러 희망들이 있지만 가장 원초적인 희망, 바로 행복을 줄 수 있는 그런 희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이 생각을 하지는 못했고 끝나기 한 시간 전쯤 갑자기 자장면과 소주 생각이 나서 남은 시간을 잘 보낸 것 같다.
일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중국집에 가서 먹을까 생각을 했는데, 짜장면과 소주를 좀 여유 있게 먹고 싶은데 그러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가서 배달을 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우선 소주를 구입하려고 마트로 향했다.
구입한 소주를 들고 집에 와서 배달앱을 켰다.
집에서 배달을 시킬 일이 거의 없으니 앱은 열심히 업데이트를 했고 오랜만에 왔으니 그에 걸맞은 할인 쿠폰들을 줬다.
그리고 평점이 가장 높은 중국집에 짜장면을 주문하려고 검색했는데, 짜장면과 볶음밥 그리고 짬뽕까지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그런 메뉴가 있었다.
각각 한 그릇씩이 아니고 다 맛볼 수 있으니 괜찮겠다 싶어 이걸 주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문 앞에 놓고 초인종'에 표시했는데 초인종 소리는 나지 않고 배달이 됐다고 해서 얼른 가지고 와서 정말 들뜬 마음에 포장을 벗기고 소주 한잔을 정성스레 따라놓고 짜장면 부분에 젓가락을 푹 찌르는 순간 뭔가 잘 못 됐구나 싶었다.
젓가락은 짜장면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약간 손가락에 힘을 주고 짜장면을 집어 올릴 수 있었다.
그릇 모양을 그대로 한 체 딸려오는 면의 붙어있는 모양을 봤다.
다시 내려놓고 급한 대로 짬뽕 국물을 두 스푼 넣고 살살 달래 가며 비벼보기 시작했다.
뭔가 일의 실마리가 풀릴 때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은 발생하지 않고 계속 제자리였다.
젓가락에 조금 더 힘을 줘서 비벼보려 했는데 면이 잘려나갔다.
짜장면은 포기하고 짬뽕에 젓가락을 담갔다.
짬뽕면은 국물을 이미 많이 흡수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짜장면처럼 떡이 된 상태는 아니니 그래도 먹을 만은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젓가락을 집어 올려서 입에 넣었는데 밀가루 풋내 라고 해야 하나 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소주 한잔을 마셨고는 짬뽕국물을 떠먹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는 정말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만, 정말 맛없는 음식도 최대한 맛있게 먹으려 노력하는 사람 중에 하나 일 것이다.
고된 노동 후에 찾아오는 식사 시간이나 이렇게 술 한잔을 곁들일 수 있는 시간은 참 소중하기도 하고 그 순간은 별로 맛없는 음식들도 상당히 맛있게 느껴지는 순간인데 그게 안되니 안타까웠다.
다 붙어서 하나가 되어 있는 짜장면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이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매번 다짐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덜 여물었나 보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내가 짜장면과 짬뽕에 실망을 하고 있을 때도 가만히 쥐 죽은 듯이 있었던 볶음밥이었다.
기름에 볶아져 있으니 퍼질 일도 없고 섞일 일도 없고 밀가루 냄새가 날 일도 없고 그렇게 꿋꿋하게 있던 볶음밥을 한 수저 퍼서 입에 넣어보니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아쉬웠던 짜장면은 먹지 못했으나 볶음밥에는 짜장면에 올라간 짜장이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히 짜장면 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이렇게 기대가 컸던 짜장면과 노동주 시간은 볶음밥으로 잘 마무리되었고 다시는 그 집에서 중국음식을 배달시키지 않아야겠다는 다짐과 여러 경험치를 남겨 주었다.
배달 어플에서는 음식이 어땠냐는 알람이 와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리뷰를 올렸다.
나로 인해 자영업자가 힘들면 안 되니까 별 다섯 개를 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