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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Dec 10. 2019

남자는 감성 사진 찍으면 안 돼?

성(性)적인 편견 (2)

출처 : 본인


남자가 풍경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으면 이상한 건가?

초저녁 즈음, 아파트 라인 입구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저 멀리 지평선에는 석양이 보였고, 그와 대비되게, 푸른 밤하늘에는 별이 하나 빛나고 있었다. 나보다 3~4살 정도 나이가 어릴 것 같은 한 남자가 주차장에서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며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흠칫 놀랐다. 그리고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에, 일상 속에서 밤하늘 감성 사진을 찍는 것은 여자들에게나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남자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하늘을 보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일반적인 사람들이 본다면 그들이 어색해하고 이상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일상 속 풍경을 진심으로 감상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던 욕구를 지금까지 참아왔었다. 남몰래 숨어서 사진을 찍거나, 그냥 눈으로만 담기 일쑤였다.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러한 행동이 무심결에 창피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내가 그 남자를 보고 놀랐던 점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사진을 찍는 자세였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떠한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이 없었다. 대신 '풍경을 보고 갑자기 사진을 찍을 수도 있지. 남자라고 못해?'라는 당당함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듯했었다. 나도 모르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르는 내 모습을 돌아보니,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BB크림 바르는 남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남자가 화장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평소에 화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지만, BB크림이나 선크림 정도는 바르고 다니곤 한다. 특히 어딘가로 놀러 갈 때는 더욱 바르게 된다. 약간의 멋 부림이랄까?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었다. 둘째 날 아침에 자외선 차단 효과가 있는 BB크림을 바르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한 친구가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뭘 바르는 거냐고 물어봤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BB크림을 바른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남자가 무슨 BB크림을 발라?


그때의 표정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어이가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깝치고 있다' 등등 여러 감정들이 담겨 있는 듯했다. 립스틱을 바르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싫어하나 의문이었다. 여자도 아니고, 여성스럽게 생긴 것도 아니면 얼굴에 무언가를 펴 바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나? 내가 주제넘은 행동을 하는 건가? 친구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그 친구는 몇몇 다른 친구들에게 내가 BB크림을 바르고 있다고 얘기를 하고 다녔다. 마치 이상한 사람 구경하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고작 BB크림일 뿐인데, 저렇게까지 반응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성역할'이라는 단어는 한 사회 내에서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행동, 성격, 태도 등을 의미한다. 예로 들면, 여자가 집안일에 열중하는 것, 남자가 힘쓰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등이 우리 사회에서 정해진 성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성은 감성적으로, 남성은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 남자는 화장을 하지 않는 것 등도 해당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그리고 학교에서 성역할에 대해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타인이 사회적으로 정해진 성역할에 따라 행동하길 기대한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성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 역할놀이를 하면, 의사, 대통령은 늘 남자아이가 맡았고, 간호사, 선생님은 늘 여자 아이가 맡았다. 당시에는 남자는 남성적이어야만 하고, 여자는 여성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팽배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살았다.


단순한 것보다는 복잡한 것을 즐기면서, 예측되지 않는 상황과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성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함을 선호하면서, 불확실성을 회피하려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발생한다. 정해진 성역할대로 모두가 행동한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정해져 있는 기준대로 빠르게 상대방을 판단할 수 있어서 편하다. 그리고 일상 속 여러 상황에서 타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는 꼴이 된다. 모든 남자가 남성적이지는 않다. 반대로 모든 여자가 여성적인 것도 아니다. 모든 남자가 축구와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모든 여자가 수다와 네일 아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경직된 성역할은 '이래야만 한다'는 조건을 계속 본인에게 걸게 하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통받게 된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획일적인 기준을 강제하게 되면, 기준에 맞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처럼 타인에게 인식되고, 하등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맞지도 않는 사회적 기준에 자기 자신을 억지로 욱여넣으려 하게 된다. 이는 개성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남성적'과 '여성적'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그것을 꼭 지킬 필요는 없다.



남자든 여자든 본인 스타일대로 살면 된다

다행히도, 과거에 비해 현재는 성역할 구분이 옅어지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지방에서는 화장을 하고 다니는 남자를 아직은 쉽게 보기 힘들지만, 서울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듯하다. 자연 풍경을 보며 쉽게 감상에 젖고, 카메라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 드는 감성적인 남자를 보면서 이제는 특이해하지 않는다. 남자가 여성스러워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밤하늘을 보며 사진을 찍던 그 남자를 보고, 나도 멋있는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그 남자는 사진을 찍은 후,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근처에서 마치 따라 하듯이 사진을 찍기라도 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로 민망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주차장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여러 번 찍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긴장한 채로 찍다 보니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후다닥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아무도 없는 계단 옆 창문을 통해 사진을 찍었다. 찍힌 사진을 보며 풍경에 감탄했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나, 나는 밤하늘을 보며 감상에 젖는 감성적인 남자였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여성적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성별과는 상관없이 감성적인 사람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졌다. 이제는 일상 속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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