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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Dec 22. 2019

아버지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아이가 되어가는 아버지, 어른이 되어가는 아들

여행이 주는 소중한 선물은?

동생이 '여행의 이유'라는 책을 학교에서 빌려왔다. 최근에 TV 등 여러 매체에 나오면서 유명해진 김영하 작가의 최신 에세이라고 하길래 덥석 낚아챘다. 유명 작가의 에세이는 얼마나 훌륭하게 쓰였을까 궁금했다. 서점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안 읽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서, 가족들과 함께 떠났던 해외 자유여행이 독서하는 내내 떠올랐다. 여행사 패키지여행을 제외하면, 우리 가족이 함께 해외 자유여행을 떠난 횟수는 총 2번이다. 대만과 일본을 갔다 왔는데, 모두 내가 가이드가 되어 가족을 이끌었던 여행이었다. 비행편, 호텔 예약부터 현지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까지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직접 했던 기억이 난다. 


자유여행은 패키지여행과는 다르게, 정신없는 여행의 과정 속에서 일행에 대해 더욱 진솔하게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숨겨진 진짜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여행이 선사하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가족과 함께한 2번의 해외 자유여행에서 모두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첫 번째로 방문했었던 대만에서 얻은 선물이 가장 의미가 깊었다. 아버지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늙어가고, 나이에 적응해간다

아버지는 평소에 무뚝뚝하고 어른스러운 편이시다.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 아니셔서, 항상 다른 이의 의견을 잘 따르는 편이시다. 나에겐 언제나 남성스럽고 배려심 있는 착한 아버지이다. 그런데 여행을 함께 떠나면서, 과거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숨겨진 모습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유여행 초심자에게 쉬운 여행지로 곧잘 추천되는 대만이었지만, 나는 여행 내내 긴장을 많이 했었다. 처음으로 해외여행 가이드로서 가족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첫날,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가족을 이끌고 과연 여행을 문제없이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나와는 다르게, 가족들은 매우 신나고 들떠 보였다. 모두들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처럼, 신축된 제2터미널을 감상하기 바빴다. 터미널을 배경으로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어대며 시시덕거렸다. 이때까지 아버지는 늘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셨다.


승무원과의 소통에 대비해 나와, 나를 도와주는 동생은 복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버지가 비행기에 처음 타보는 것은 아니었다. 제주도 여행과 해외 패키지여행을 여러 번 갔다 왔었기 때문에 비행기는 익숙하셨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창밖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셨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성층권에 돌입하기 전까지 작아져 가는 영종도만 계속 쳐다보고 계셨다. 그리고 도착하기 직전, 대만 상공에서 하강할 때는 창문에 더욱 바짝 붙어 몰입하셨다. 처음 보는 대만의 풍경에 매료되었는지 한껏 호기심이 충만한 눈빛이었다. 비행기에서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단지, 대만에 처음 와봤기 때문에 나타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타이베이 국제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통과하고,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면서 아버지께서는 마음속에 숨겨놓았던 아이를 세상 밖으로 꺼내셨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뒤에서 볼 때 상당히 천진난만해 보였다. 행동이 한국에서보다 더욱 활발해졌고, 표정은 눈이 동그레진 상태로 시종일관 밝았다. 눈빛은 한국에서의 무덤덤했던 것과는 다르게 초롱초롱했다. 세상 물정에 관심이 원래 많았던 사람처럼 변했다. 게다가, 원래 본인의 생각을 잘 표현하지 않고, 나서는 편도 아니셨지만, 여행지에서는 사사건건 참견하셨다. 타이베이 도심에서 숙소를 찾을 때, “저 보라색 건물 아니냐?”라며 거침없이 본인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내가 지도를 찾아보겠다며 기다려보라고 해도, 본인이 먼저 가보겠다고 저 멀리 앞장서서 건물을 두리번두리번 찾아다니셨다. 가이드인 나로서는 아버지가 내 말에 잘 따라주기를 바랐지만, 그럴 생각이 별로 없으신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아이스러움은 관광지에서도 계속되었다. 주변 건물과 경치, 현지인들을 관찰하느라 계속해서 360도로 두리번거리셨다. 잠시도 쉬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눈으로 담느라 바쁘셨다. 사진은 어찌나 많이 찍던지, 셀카봉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멋있는 풍경을 찍기도 하고, 가족들에게 셀카를 찍자고 자주 보채기도 하셨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많은 듯하셨고, 평소보다 식욕이 왕성해지셨다. 식사 때가 되면 배고프다고, 밥 먹자고 투정을 부리시기 일쑤였다. 식사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표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느닷없이 별거 아닌 일에 신경질을 내고 고집을 부리기도 하셨다. 어르고 달래는 일을 계속하다 보니,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간식도 중간중간 챙겨야 했다. 평소에 음식을 잘 가리는 분이지만 여행지에서는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많으셨는지, 지나가다가 가판대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이 있으면 바로 사달라고 하셨다. 나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을 세며 현금으로 계산하느라 참 바빴다. 그래도, 가장 당황스러웠던 때는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 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는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시다가, 뜬금없이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실 때가 있었다. 소변이 너무 급하다고 하시니까 서둘러 찾아야 할 수밖에 없었다. 관광지에서는 공용 화장실을 찾기 위해, 길거리에서는 지하철역이나 백화점 내에 있는 화장실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철부지 아들 같은 모습에 화가 많이 났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이 솔직히 보기 싫었다. 여행이 내 뜻대로 통제가 되질 않으면서, 아버지가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랬다. 내 말에 제발 잘 따라달라고 사정하기도 했었다. 나는 아버지가 평소처럼 점잖게 행동하고, 인내심과 배려심이 많기를 바랐다. 가이드인 나를 잘 따라주고, 아들인 나를 잘 챙겨줬으면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기대와는 반대로 행동하셨다. 마치 내가 아버지가 된 것 같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이처럼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워하셨다. 아이들이 새롭고 신기한 곳에 도착했을 때 흥분해서 막 뛰어다니는 것처럼 아버지는 항상 신나 있으셨다. 여행 중에 가장 신났을 때가 타이베이 101 빌딩에 도착했을 때였다. 택시를 타고 빌딩 앞에 도착했고, 고개를 들어 빌딩 전경을 바라보더니 “엄청 높네”라고 하시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빌딩의 웅장하고 전통적인 디자인과 주변 거리의 북적거림을 느끼셨다. 그러다가 ‘LOVE’ 동상 앞에서 갑자기 “아싸!”라고 하시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셨다. 당시에 그 모습을 볼 때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상당히 부끄러웠다. 현지인과 다른 한국 여행객들의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나이에 안 맞게 아이처럼 행동하는 아저씨의 모습으로 비칠 것 같아 창피했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아무리 즐거워도 그런 행동은 조금만 참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 하지만, 부탁할 때만 잠시 주눅 들고 내 눈치를 봤을 뿐, 그 이후로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여행이 끝날 때까지 다시 아이처럼 신나 있으셨다. 무슨 말을 해도 기분에 취한 아버지가 귀담아듣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자리에서 방방 뛰지 말라고 한 이후부터,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내버려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었다. 너무나 즐거워하는데, 괜히 쓴소리를 해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졌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자기가 직접 해보고 싶다고 나서는 아이처럼, 때로는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처럼 행동하는 아버지를 보며, 과거와는 다르게 많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예전에 ‘때가 되면,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다시 아이가 되어간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우스갯소리로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대만에서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흘러서, 나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고 아버지는 다시 어른에서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앞둔 나는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를 챙겨드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아버지는 사회생활을 마칠 날을 바라보고 계시고, 조만간 나의 도움을 받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일상을 정신없이 이어간 나머지, 시간은 묵묵히 흐르고 있다는 진리를 평소에 잊고 살았었다. 나와 아버지는 서서히 본인의 나이에 적응하고 있었다.



대만 '여행의 이유'

김영하 작가는 책 ‘여행의 이유’에서 ‘추구의 플롯’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는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가 있다고 설명한다. 대만 여행의 외면적 목표는 ‘힐링’이었다. 우리 가족은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 대만에서 훌륭한 볼거리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추구했던 ‘외면적 목표’를 달성했다. 괜찮은 여행이었다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한국에 돌아와서 나에게 모두 긍정적인 후기를 남겼다. 하지만, 나는 외면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가이드였던 나는 여행을 했던 3박 4일 동안 상당히 힘들고 지쳤었다. 천방지축 아들 같은 아버지를 모시느라 힘들었고, 그에 더해 다른 가족들도 함께 이끄느라 피곤했었다. 차근차근 구경하기에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고, 원래 해외에서는 입이 짧은 터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반대로, 나도 모르게 추구했던 ‘내면적 목표’는 달성했다. 여행은 동행자에 대한 ‘뜻밖의 사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난 아버지에 대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월은 이미 많이 흘렀고, 아버지는 나이를 먹으며 점점 아이가 되어 간다는 것. 이를 통해, 아이인 나를 돌봤었던 과거의 아버지처럼 내가 아버지를 돌봐야 할 때가 조만간 오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에 대해 깊게 알고 싶다는 내면적 목표를 세우고 인천공항에서 이륙하지는 않았을까.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또한,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 목표가 아닌, 내면적 목표를 달성하게 만든다고 작가는 책에서 말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주인공인 ‘대만 여행기’는 잘 쓰인 이야기이지 않을까. 그래서 대만 여행은 힘들었지만 뜻깊은 여행으로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 river seal, "taipei 101 love",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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