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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Mar 06. 2020

신종플루의 추억

2009년 신종플루 확진자가 바라보는 '코로나19' (1)

요즘 나는 '코로나19'로 인해 '자발적'으로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매일 몇백 명에 달하는 확진자들이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다. 학교에는 약 한 달가량 휴교령이 내려졌고, 공무원 시험 등 대규모 행사는 모두 취소됐거나, 4월 이후로 연기되었다. 마스크를 구매하기 위해 지역 우체국, 하나로마트, 약국에서 수십 명의 시민들이 매일 아침부터 줄을 선다. 거리는 한산해졌고, 마트와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는 사람이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매일 뉴스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종종 뉴스 자료화면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음압병상에 격리되어 있는 환자를 볼 수 있었다. 난 그분들을 보며,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약 10년 전에 유행했던 '신종플루'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가 '코로나19'에도 약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느껴졌다

난 2009년에 신종플루 확진자였었다. 확진 판정을 받은 날짜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발생했던 시기가 10월부터였고, 신종플루의 전염병 위기 단계가 '심각'으로 상향되었던 것이 11월이었다.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가 적극적으로 처방되었던 것도 11월이었다. 그때의 옷차림을 떠올려보고, 여러 상황을 따져보면 11월 즈음에 확진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중학생이었다. 신종플루가 대유행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휴교를 하지는 않아서 늘 그랬듯이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폭풍전야'라는 말이 있듯이, 일은 어느 날 갑자기 터졌다. 내가 속해있던 반의 한 학생이 기침을 콜록콜록하기 시작했다. 열도 나기 시작했는데, 열은 점점 심해졌고, 보건실에서 해열제를 먹어도 나아지지가 않았다. 증상을 호소하는 학생이 처음에는 1명이었다가 3명, 5명, 10명... 반나절도 안되어 순식간에 수많은 학생들이 기침, 발열 등의 증세를 호소했다. 나는 친구들이 단체로 콜록콜록하는 모습을 2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의아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신종플루를 의심했고, 수업 중이었는데도, 증상을 호소하는 학생들을 모두 근처 대학병원의 임시진료소로 급하게 보냈다. 한 반 정원이 40명 정도였는데, 각 학급별로 절반 정도의 학생들이 그날 동시에 임시진료소로 가게 되었다. 단 하루 만에 학교 전체 학생의 절반 정도가 전염병 환자가 된 것이었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에 문제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니, 고열이 나면서 근육통과 오한(발열에 의해 추위를 느끼며 몸을 덜덜 떠는 증세), 기침 등의 독감 증세가 나타났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등교할 수 없어 병원에 가야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일반 병원에서 진찰 후, 신종플루가 의심된다며 인근 대학병원의 임시진료소로 가기를 권했다. 동생에게도 미열 증세가 나타났기에 전염이 의심되어, 곧장 차를 타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진료소로 향했다.

2009년 당시 분당서울대병원 신종플루 임시진료소 (병원신문)


임시진료소는 병원 응급실 옆에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가건물이었다. 내부에는 접수 데스크와 진찰실이 있었고, 대기하는 의자가 一자로 진찰실 옆에 주르륵 놓여 있었다. 간호사께서 체열기로 내 열을 쟀다. 그분이 깜짝 놀라시더니, 열이 39도라고 알려줬다. 그 정도의 펄펄 끓는 고열은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오르던 열은 39도를 찍었는데도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다른 증상은 제쳐두고, 고열이 너무 힘들었다. 눈을 감으면 눈 앞에 별들이 보였고, 이마를 망치로 둔탁하게 때리는 듯한 두통도 느껴졌다. 게다가 마치 잠에 드는 것처럼 의식이 점점 흐려지기도 했었다.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친구가 지나가며 인사를 하는데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손을 들 힘조차 없었고, 쳐다보는 것 자체도 너무 힘들었다. 흐려지는 의식을 겨우 붙잡으며, 엄마의 품에 눈을 감고 기대어 순서를 기다릴 뿐이었다. 진료소 옆쪽에 있는 응급실 입구로는 종종 신종플루 중증 환자들이 실려 들어갔다. 열이 40도가 넘어가면 응급실 입원이 필요했었다. 그 모습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나도 이 상태로 시간이 흘러가다 보면 저 사람들과 똑같이 실려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학교 내에서 급격하게 전염되어서 그런지, 임시진료소 안에는 내 또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대부분 청소년들이 환자였고, 보호자가 함께 섞여 마스크도 없이 혼잡하게 앉아 있었다. 대기자가 너무 많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그 많은 사람들 중, 고열을 호소하며 겨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 혼자 뿐인 듯했다. 1분 1초가 너무 길었던 순간이었다.


진찰실에 들어갔고, 의사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내가 여러 증상을 설명했고, 선생님은 열을 쟀다. 의심 증세를 보이는 유증상자를 모두 확진자로 판단해서 그런지, 긴 면봉을 코 안으로 넣는 코로나19 검체 검사 같은 특별한 검사 없이, 바로 타미플루를 며칠치 처방해주셨다. 그리고 치료되는 며칠 동안 자가격리해서 생활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상태가 너무 안 좋은 나머지, 임시진료소에서 약을 하나 바로 먹었다. 그리고는 터덜터덜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전염병 예방에 상당히 성숙해졌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뉴스를 보고, 그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10년 사이에 참 많은 게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마스크를 쓴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다. 한창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시기였는데도 학교 내에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쟤 왜 저러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요즈음에 줄을 서가며 사고 있는 마스크는 보건용·방역용 마스크인데, 10년 전에는 그런 용도의 마스크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당시에 의료인과 시민들이 착용했던 마스크는 위생 면 마스크였다. 동네 약국 약사에게 여쭤보니 위생 마스크는 입자 차단 성능이 약 5% 정도라고 한다.


임시진료소에서도 마스크를 쓴 환자와 보호자가 거의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환자들이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데도 환자가 아닌 보호자까지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다. 그나마 의사, 간호사 등 의료인들이 위생 마스크를 착용했었는데, 모두가 꼼꼼하게 착용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마스크 없이 근무를 하기도 했었다. 내가 들어갔던 진료실의 의사 선생님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진료를 보고 계셨었다. 


전신 방역복은 외계인이 침공했을 때나, 영화 속에서나 보는 건 줄 알았다. 당시에는 전혀 구경하지도 못했었고, 방역 장갑을 낀 사람도 찾기 힘든 정도였다. 외부로 공기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만든 병상인 음압병상은 그런 병상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일반 국민들이 전혀 알 수가 없었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신종플루 환자들은 아무런 음압 장비 없이 오픈된 상태에서 응급실로 이송되었고, 별도의 공간에 분리 수용되긴 했지만 역시나 오픈된 공간에서 치료를 받았었다.


사회적 교류를 삼가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한창 국내에서 대유행했던 10월~12월 사이에도 학생들은 학교에 정상적으로 등교했다. 공무원 시험, 토익 시험 등의 전국적인 시험이나 지역축제, 콘서트 등의 대규모 행사들이 취소, 연기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다. 대형마트나 시장, 식당의 손님들이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정상적으로 외출을 하고 사회생활을 했었다. 조금 독한 감기가 유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걸리면 걸리는 거지 뭐~'라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신종플루에 대해 안일하게 받아들였고, 별다른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음식을 끓여먹으면 신종플루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는 조언을 의심 없이 믿으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완전히 다르다.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이고, 아침부터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구매할 정도로 마스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공공장소에 대한 방문도 눈에 띄게 줄었고, 서로 거리를 두고 앉는 등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2009. 8. 신종플루 유행 당시 의료진의 모습(왼쪽)과 2020. 2. 코로나19 선별진료소 의료진의 모습(오른쪽) (한국일보)


의료인들은 전신 방역복에 고글, 방역 장갑, 방역 마스크까지 모든 방역 장구를 갖추고 열심히 근무를 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과거에 비해 많은 수의 음압병상이 활용되고 있고, 비록 격리병상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 대안으로 생활치료센터 수용이나 자가격리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들을 역학조사를 통해 전수 조사하여 모두 일정 기간 동안 자가격리를 시키고 있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충실하게 그 의무에 따르고 있다.


신종플루 때야, 미국에서 첫 환자가 발생하고 나서 약 6개월 정도 후에 국내에서 대유행했고, 기존에 대체 가능한 치료제가 존재했으면서, 약간의 변형을 거쳐 빠른 시일 내에 백신을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치료제와 백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빠른 확산세로 신종플루가 번졌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이 되기 전에 진정 국면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코로나19는 신종플루보다 더욱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무증상자 등의 뚜렷한 증상을 호소하지 않는 감염자들이 더 높은 비율로 발생하고 있다. 중국 우한 시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지 아직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사스나 메르스 등의 코로나 바이러스의 경우 치료제와 백신이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다. 새로 개발되려면 최소 1년이 필요할 것이라 예측되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신종플루처럼 또는 더 급격하게 번진다면, 기존 예측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전 사회가 받게 될지도 모른다.


작금의 다양한 방역 조치들과 시민들의 성숙한 행동들은 꼭 필요하며, 당분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0년 전, 만약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적극적으로 착용했었다면, 대유행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휴교령을 내렸었다면, 반나절도 안 되어 학교 전체 학생의 절반 가량이 전염병 환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었을까? 내가 병원에서 39도의 열을 견디며, 응급실로 실려가는 중증 환자를 보고 공포에 떨 필요가 있었을까? 그때 우리는 전염병에 너무 무지했다. 혹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미한 증상을 호소한다며, 감기와 다를 게 뭐가 있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과거에 나도 열이 39도까지 오르며 의식을 잃어갈 줄은 몰랐었다. 누가 중증 환자가 될지는 걸리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설사 본인은 별다른 증상 없이 넘어간다 하더라도, 소중한 주변인들 중에 본인이 누군가를 전염시킬 수 있고, 그중 일부는 중증 환자가 될 수도 있고 심한 경우 사망할 수도 있다.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모두가 감염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가 아닐까.


매일 뉴스를 챙겨보며 상황이 최대한 빨리 진정되기를 하루하루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사망자가 발생할 때마다 마음이 참 무겁고, 가까운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온몸을 땀으로 적시며, 때로는 탈진하거나 구토를 하기도 하면서 근무하는 의료인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나에게도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경각심을 늘 가지게 된다.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짧은 기간 내에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올해 상반기 동안은 계속 조심해야 될 것이란 직감이 느껴진다. 내 직감이 제발 틀리길 바라며 오늘도, 내일도 모두를 응원할 것이다. 힘내시길 바란다.




이미지 출처

강원일보, "강원도내 코로나19 확진자 3명 첫 퇴원", 2020.03.04.

병원신문, "신종플루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 2009.10.29.

한국일보, "신종플루 vs 코로나19… 같은 장면 다른 장면", 2020.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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