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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Mar 22. 2020

구김살 없이 살아온 사람이 부럽다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 '엄친아'에 대한 소식

최근, 엄마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친한 친구의 아들이 어느 공공기관에 취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셨다. 그 사람은 취업준비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졸업과 동시에 정규직에 합격해서 다음 달부터 출근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엄마는 그 자리에 있던 본인과 다른 아주머니들이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들 심란해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그 얘기를 하면서 "너도 걔처럼 좋은 데 취업해서 잘 돼야 할 텐데...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나는 그 엄친아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단지, 중학생 때 학원에 같이 다닌 적이 있고,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대학에 재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정도? 그리고 가끔 지나가면서 볼 때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다니는 것을 보고,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는 정도, 딱 그 정도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과거에 학원에 다닐 때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와 비교하면 사실 못하는 축에 속했었다. 그랬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와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었다. 그리고 전공한 과에서 상위 5% 이내의 우수한 학생들만 취업한다는 공공기관에 너무나도 빠르고 쉽게 취업했다는 소식을 엄마를 통해 듣고는 엄청 놀랐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저 사람도 저렇게 취업하는데 난 뭐 하고 있는 거지?"였다. 자괴감이 들었다. 나도 대학 시절 내내 과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으려고 피나게 공부했고, 방학 때마다 쉬지 않고 자격증과 어학점수를 따면서, 여러 대외활동과, 알코올 쓰레기여서 참석하기 싫었던 회식에 참석하면서까지 공공기관에서 인턴생활을 성실히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싶었다. 여기서 생각이 멈췄다면, 한번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서 인생에 대한 열정을 더욱 불태우는 기회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얘기를 듣고 솔직히 화가 났다. 물론 나에 대해 화가 난 것이었다. 



구김살 짙은 내 학창 시절

나는 구김살 짙은 내 과거가 떠올라서 너무 화가 났다. 유치원 때부터 대학교까지 잡음이 끊긴 적이 없었다. 한없이 착하고 바보 같은 나를 친구들은 만만한 상대라 여겼고, 무시했다. 그래서 나는 의외로 주먹다짐을 자주(?)해봤다. 친하지도 않은 애들이 재미있다고 자주 놀리고, 툭툭 치며 시비를 걸곤 했었는데, 하지 말라고 그만 하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들어먹질 않았다. 한 사람이 놀리다가 여러 명이 놀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보니, 놀리지 않는 다른 친구들도 나를 무시하고 하대했다. 본인들에게 내가 조금 편하게, 쉽게 대하는 것 같으면 까칠하게 굴거나 말을 섞지 않았다. 대놓고 말을 씹으며 친구가 되기 싫어하던 애들도 있었다.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누군가의 놀림거리가 되는 것이 나는 너무 싫었다. 그래서 건드리지 말라고 공공연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비를 거는 몇몇 애들에게 주먹으로 선빵(?)을 날리며 싸우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도 괴롭히는 애들은 항상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누군가가 집 현관문에 밀크 커피를 뿌리고 간 적도 있었고, 어떤 애들은 나와 같이 앉기 싫다며 혐오하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지은 적도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깝치지 말라고 무시당하는 것은 뭐, 평범한 일이었고, 어울리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못 본 채 하거나, 나를 두고 본인들끼리만 여행을 갔다 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애는 내 앞에서 대놓고 본인의 다른 친구들에게 나를 왕따 시키자고 말하기도 했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여렸는데, 이런 말과 행동들은 나에게 비수로 꽂혔다. 사춘기가 오기 전에는 가끔 이유 없이 울긴 했었지만, 그나마 씩씩하게 이겨냈다. 하지만 사춘기가 오자, 청소년 우울증도 함께 찾아왔다. 누군가에게 무시를 많이 받다 보니, 피해망상이 생겨서 친구들의 평범한 말과 행동도 나를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심장이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매일매일 멍한 상태로 슬픈 생각에 잠겼었다. 머릿속에 나를 비하하는 말들이 가득했었고, 나 자신에게 '나는 왜 사는 거지?'와 같은 자학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몇 년을 그렇게 보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바로 우울증이었다. 학교에 가기 싫어 불면증도 왔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누군가가 내 옆에서 나를 욕하는 듯한 환청이 들리곤 했고, 툭하면 가위에 눌리곤 했다. 많이 눌릴 때는 발버둥 치며 1시간에 한 번씩 깨기도 했었다. 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불을 켜고 잔 적이 많다. 그러다 보니 잠을 제대로 푹 자질 못해서 늘 기운이 없었다.


심리적으로 제일 힘들었을 때는 망상 증세도 있었다. 누군가가 전자파를 이용해 나를 도청하고, 정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진 적도 있었고, 소행성이 떨어져 전 세계에 큰 재앙이 터질 것이라고 한동안 믿은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사실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너무 피폐해지면 현실감각을 잃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현실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흐르면서 심리적 고통에 조금씩 무뎌져 갔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매일매일의 집단생활을 벗어나서 그런지, 심리적 문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견뎌내야 할 사건들은 많았다. 선배에게 밉보인 나머지 안 좋은 소문이 과 전체에 돌아 사람을 일부로 피해 다닌 적도 있었고, 사소한 다툼 때문에 친구에게 고소를 당한 적도 있었다. 사람 간의 문제는 계속 발생했고, 해결하기 위해 정말 많이 고민하곤 했다. 그러다 어쩌다 보니 군대를 다녀왔고, 그 후에는 그나마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나에게 삶이란 '고난' 그 자체였다. 집단생활 내에서 끊임없이, 온전히 생존할 것을 요구받았고, 맞지 않는 신발을 욱여 신듯이 어떻게든 사람들과 어울리며 순탄하게 집단생활을 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누군가는 학창 시절이 추억이겠지만, 나에겐 버텨내야만 했던 과거일 뿐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 기억이 아닌,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외톨이로 지내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생존해낸 기억으로 남아있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친구를 사귀고 함께 어울리기 위해, 항상 친구들을 관찰하고 친구들의 생각과 행동의 원인을 추론해내야만 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나만의 지혜를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힘들고 괴로운 과정에서 나는 늘 이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었다. 


'언젠간 나도 남부럽지 않게 성공할 것이다'


위인들이 어렸을 때의 고난을 이겨내고 위대한 성과를 마침내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도 불행한 과거에 대한 '보상'을 나중에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너무나 불행해서 엄청난 보상이 찾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지금의 고난이 나중에 얻게 될 어떠한 큰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것만 같았다. 보상을 받기 위해선 계속 살아있어야 한다고 독기를 품곤 했었다. 이런 독한 믿음으로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다. 불행한 만큼 나중에 보상받게 될 것이란 희망이 없었다면, 도중에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고생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란 믿음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작년부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도 하면서 인생을 조금 즐길 줄도 알게 되었다. 바다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내가 드디어 해수면에서 둥둥 떠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엄마에게, 처음부터 해수면에 있었는데 이제는 훨훨 날아다니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 자신에게 화가 너무 났다. 그 '엄친아'는 구김살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조직에 속하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었고, 학교생활에서 특별히 문제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내 또래의 누군가는 순탄하게 상승세를 타며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나는 밑바닥에서 올라와 이제야 평범한 삶에 겨우 도달했으니...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난 왜 그렇게 불행하게 살았어야만 했나, 내 인생은 왜 고난의 연속이었나, 왜 남들 사는 것만큼도 못 살았나, 지금까지의 살아온 과거가 너무나 후회되었다.


구김살 없이 살아온 사람은 과거를 돌아봐도 화가 날 것이 없다. 하지만 구김살이 짙은 사람은 돌아보기 전부터 화가 난다. 누군가는 이미 평범하기 때문에 꾸준히 성장하며 남들보다 우월해진다. 하지만 그 반대의 사람은 평범해지기 위해 성장한다. 출발선과 목표가 애초에 다르다. 세상 참 불공평한 것 같다.


언제쯤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든,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든, 책을 낸다든지 등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든, 해가 쨍하고 뜨는 듯한 긍정적인 일이 나에게 생겼으면 한다. 요즘도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과거에 불행했던 것은 미래에 행복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상심리'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걸 알지만,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 희망이 있어야 하루를 살아갈 수 있으니까. 


난 내가 나중에 그 '엄친아'보다 더 성공할 것이라 믿는다. 힘들게 살아온 만큼, 남들보다 현명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런데도 한편으론 구김살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부럽다. 인간의 마음은 참 모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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