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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Apr 19. 2020

화 많은 사람의 자식이 불쌍하다

화 좀 함부로 내지 마세요.

"다시 오시라 그래! 다시 해!"


팀장이 이렇게 말하고는 결재받아야 하는 서류를 내 앞에서 찢어버렸다.


흥분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퇴근하고 2시간이 지날 때까지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었다. 반년도 안 되는 정말 짧은 기간 동안만 일하는 계약직 인턴이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회사를 다녀야 하나 싶었다. 대부분의 인턴들은 어리다고, 일 배우고 직장 체험하면서 잠깐 있다 간다고 직원들이 살살 다루던데, 나는 왜 냉정하면서 화가 많은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되었나 원망하기도 했었다.


내가 일하게 된 직장의 인턴은 여러 기업에서 온 대표나 직원들에게 서류 작성을 요청하는 업무를 한다. 몇 가지 서류를 보여주며, 업체명과 성함 등을 작성하게 하고 인감 날인이나 서명을 받는 일이었다. 받아야 되는 서류가 많아서 초기에 배우고 적응하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난 아직 입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재를 처음 받아보는 건 아니었지만, 실수를 한 건 처음이었다. 성함을 딱 하나 빼먹은 것이 문제였다. 과거 서류를 보니, 가끔씩 직원들도 빼먹기도 하고, 그냥 조용히 넘어간 적도 있었던 그런 실수였다.


최근에 인사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팀장이 발령된 듯했다. 처음 인턴으로 입사했을 때, 팀장을 보고 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신경질적이면서 틱틱거리는 말투에 직설적이면서 다혈질인 성격. 기가 보통 센 사람이 아니었다. 군대에서 비슷한 사람을 처음 봤었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번 경험해봤기에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부하직원에게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며 때로는 화가 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반면에 상사에게는 아첨을 하면서 '딸랑딸랑'을 정말 잘하는 사람. 전역하고 나서 다시는 저런 사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번에 또 재수 없게 마주치게 된 듯했다.


팀장은 내가 결재를 맡기 전, 한 전화를 받고 스트레스를 이미 받은 상태였다. 설명을 해도 상대방이 설득되지 않았고, 그래서 대화가 쉽게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불친절하고 띠꺼운 말투로 설명을 하는데, 상대방과의 대화가 부드럽게 흘러갈까? 기분 나쁘게 통화가 끝날 것임을 나는 직감했다. 욕을 하며 전화를 끊는 것을 보았다. 화가 잔뜩 달아오른 듯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당일에 무조건 끝내야 해서 결재를 나중으로 미룰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결재를 맡았다. 팀장은 내 실수를 단번에 알아챘고, "어? 이거 이름이 없네! 다시 오시라 그래! 다시 해!"라는 신경질적인 화는 나에게 비수로 날아왔다. 게다가 내 앞에서 결재서류를 찢는 행동은 더 큰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곱씹을수록 화가 더 났다. 꼭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시 방문하시도록 연락하고, 방문하시면 성함을 직접 쓰게 하라는 말을 꼭 그렇게 화를 내며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내 앞에서 서류를 거칠게 찢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 계약직 인턴에게?


다른 직원들이 곧장 나에게 와 위로의 말을 남겼다. 대부분은 이미 한번 방문했던 사람을 다시 불러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내가 힘들어할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 일은 재방문에 대해 당사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난 팀장의 말과 행동에 화가 나고 상처를 받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부하직원들은 이미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인턴에게 팀장 욕을 하기는 싫었던 것인지, 그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할 때, 자신의 대부분의 진짜 성격을 숨긴다. 자신의 본성을 필터링해 보여주면서 그럴싸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사회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다. 본모습은 가정 내에서 발견된다. 매일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내고, 사회적 가면을 쓰는 것에 대한 피로 누적을 피하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끼리는 서로 허물없이 지내게 된다. 자기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가족이기 때문에 가정 내에서는 본모습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화가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의 자식들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직장에서 부하직원에게도 화를 잘 내고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데, 자기 자식에게는 얼마나 더 많이 그럴까. 팀장의 자식은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것 같던데, 어린 나이에 알게 모르게 부모에게 상처를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별거 아닌 실수에 엄격하게 혼을 내진 않았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순간에 냉정하게 대하진 않았을까?


이해와 배려 없는 과격하고 날카로운 말과 행동은 영원한 상처를 만들어낸다. 말은 아껴야 하고 행동은 조심스러워야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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