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박 Nov 28. 2023

끝내 따지 못한 샴페인

어느 교수의 승진



오래도록 간절히 원하던 승진, 아니 트랙 전환이 되었다. 약 두 달간 일반 신규 임용 과정과 유사한 심사를 받았다. 지원서를 쓰고 2차 심사에 이어 최종 면접에 이르는 꽤나 긴 여정이었다. 그렇게 원할 때는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던 일인데, 갑자기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승진이 확정되고 공고가 났다. 학교 생활을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암호문 같은 공고였다. 몇몇 교수들에게 축하 문자가 왔다.


마침내, 정년트랙 교수가 된 것이다.


언젠가 정년트랙이 되는 날 마시자며 해외 출장길에 남편이 사 왔던, 오래도록 냉장고 구석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축하 샴페인을 드디어 터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날 공고 소식을 듣고 축하 케이크를 사 온 남편에게 샴페인은 계약서를 쓰고 홀가분하게 터뜨리자고 했다. 승진여부를 확인했을 뿐, 내게 주어질 새로운 임용계약의 내용은 모른 채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날 샴페인을 마셨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후 계약서를 쓰던 날, 계약서 문구들을 찬찬히 읽어보던 나는 무너져 내렸다. 멍하니 앉아있는 날 마주한 인사팀의 직원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듯했다. 계약서 속의 그토록 갈망하던 나의 자리는 비정년도 정년도 아닌 중간 어디쯤이었다. 임용 시장에서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결코 다시 풀고 끼울 수 없는 것이었음을 일찌감치 알았어야 했다.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상상을 참 많이도 했었다. 이제 전세가 아니라 오래도록 살 수 있는 집을 구해야겠다는 다짐부터.. 내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안정적으로 꾸려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었다. 참 순진했었다.


우린 끝내 샴페인을 터뜨리지 못했다.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심하게 체한 기분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순간에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가진 것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찾자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를 만큼 난 성숙하지 못했다. 너무나 화가 났고, 몸이 아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수업과 상담에 시달리다 돌아온 저녁. 여전히 그 자리에서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냉기를 뿜어대는 널 보며, 조용히 냉장고 문을 닫았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의 영구치를 닦으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