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양 May 18. 2021

밤샘은 방송 작가의 업보

맥 빠지는 직장생활




밤샘은 방송 작가의 업보 



방송 작가 사이에 명언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다.

'밤샘은 방송 작가의 업보'


그렇다. 방송 작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더럽게 밤을 많이 새울까. 


나는 현재 방송 작가 일을 쉬고 있지만 

밤샘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밤을 많이 새웠다.


밤샘의 동반자 '핫식스'와 함께 참 무던히도 많은 밤을 새웠다.

12월 31일에 밤을 새워서 1월 1일 떠오르는 태양을 사무실에서 보기도 했을 정도니... 

처음에는 핫식스를 먹었을 때 잠이 깨서 '우와!! 대단한 녀석이다!!' 했지만

나중에는 면역(!)이 생겨서 핫식스 + 커피를 먹어도 잠이 왔다.


그래서 몬스터와 레드불이라는 센 녀석들을 먹었더니 

몸은 피곤한데 정신이 멀쩡해서 마치 유체이탈을 한 것 같았다.  

고 카페인 음료를 매일 마시면 당연히 몸에 좋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농담으로 '하루를 당겨 쓴다'라고 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밤을 새웠고 가장 많은 핫식스를 들이부었던 방송은 단연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

매주 월요일 방송을 준비하는 팀이면 

화수목금토일에 아이템 서치, 취재, 섭외, 촬영을 하고 

토~일요일에 편집을 하는 스케줄이다. 

일요일 밤 밤 11시, 늦으면 새벽 2~3시쯤 편집 영상이 나오면 

자막을 쓰고 대본을 써서 스튜디오로 넘긴다. 

그러면 오전 8시 30분, 생방송이 시작된다. 


이게 정상적인 스케줄이고 

만약 그날 긴급 사건이 터져서 촬영이 늦게 끝나거나 편집이 늦게 끝나서

새벽 5시~6시에 편집 영상이 넘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냥 죽음이다 (상상하기도 싫다)


보통 7~8분 되는 영상을 담당하게 되는데 (한 팀에 총 5~6명의 작가, PD가 각자 영상을 담당한다) 

이 정도 길이의 VCR이면 자막은 넉넉하게 2시간,

내레이션 대본은 넉넉하게 3~4시간 정도 걸리는데 

(내가 손이 빨라서 이 정도 걸리고 다른 작가님들과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새벽 5시? 6시? 이때 편집 영상이 넘어오면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고작 많아봤자 2시간!

(작가님들 간담이 서늘하시죠) 


이미 밤을 새워서 좀비로 각성이 되어있는데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서 글을 써야 한다.

정보전달이 위주인 건강, 살림, 여행은 어떻게 쓰기라도 하지.

사건, 시사, 기획, 르포성의 아이템은 인과관계와 팩트를 정확하게 써야 해서 

보통 원고 쓰는 시간보다 배가 걸린다. 



방송 원고가 어떤 건지 잘 모르실 분들을 위한 원고 예시


예를 들어 화재사건을 VCR로 만들면 


#NA

지난밤, 00시 서울 00동에서 화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다름 아닌 집주인 00 씨! 

그는 왜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걸까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주민 인터뷰

"그 사람이 평소에도 좀 이상했어요~"



이렇게 영상에서 그림을 설명하고 뒷받침하는

'내레이션'을 쓰는 것이 원고이다. 


# 생방 30분 전

오전 8시, 스튜디오에서 슬슬 전화가 온다.

8시 30분 생방인데 왜 아직 원고가 안 왔냐고.

하... 원고가 8장인데 이제 2장째다. 식은땀이 흐른다.


8시 20분,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지른다.

"원고 내놔!!!!!!!!"


아직 5장째다. 

이제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쓴다.

8시 30분, TV에서 생방송이 시작됐다.


이때가 제일 식은땀이 흐른다.

난 아직 원고를 쓰고 있는데 생방송을 하고 있다니...

후다닥 원고를 넘기고 10분 뒤, 

내가 담당한 VCR이 방송으로 나온다.


이제 막 원고를 받아 든 리포터는 분명 당황했을 테지만

능숙하게 처음 본 원고의 글자를 틀리지 않고 읽어나간다.

그렇게 무사히 생방송을 마친다. 

24시간을 불태우고 그대로 집으로 간다.

쓰러져서 잔다.

그리고 다음날, 또 출근해서 아이템을 찾고 

이 루틴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이러니 '밤샘은 작가의 업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사실, 아침 생방송은 당연히 밤을 새워야 하는 프로그램이고 

이것보다 더한 프로그램이 많다.


나는 독하디 독한 MBC 시사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돌발상황들이 많은지 집에 갈 수가 없었고

3일 동안 밤을 새우다 지쳐서 책상 위 노트북을 치우고 그대로 올라가서 자기도 하고 

집에는 못 가지, 씻기는 해야 하지 그러니까 찜질방에서 대충 씻고 

속옷과 옷을 사서(!) 입기도 했다.

미용실에서 5천 원주고 샴푸만 하는 작가들도 굉장히 많았다. 


잠깐 집에 갔다 오면 안 되냐고? 

없다! 왜냐? 


시사 프로그램 특성상 언제 아이템이 바뀔지 모르고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그리고 작가, PD 모두가 그렇게 밤을 새우고 있으니 갈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업무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만 6~7년 전만 해도 

방송가에 일명 '꼰대'라는 사람들이 참 많을 때여서 

'나 때는 다 그렇게 했어, 다 밤새고 고생했어'

라떼를 참 좋아하는 그분들 때문에

그들이 고생한 만큼 똑같이 고생을 해야 했다.


# 밤샘이 없는 삶

방송 작가를 하면서 밤을 새우고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

그래서 이제는 안정적인 회사에서 출퇴근을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가끔 치열하게 밤을 새우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때는 '제발 잠 좀 자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할 정도였는데

한바탕 전쟁을 치러서 그런지, 평화로운 지금의 일상이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분명한 건, 나는 그 시절 밤샘을 하고 치열하게 살면서도 

'재밌었다' '즐거웠다' '행복했다'


'나는 밤새는 게 힘들다'라고 생각 들면 훗날 이 순간은 악몽으로 남을 것이고

'나는 밤새는 게 즐겁다'라고 생각되면 훗날 이 순간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악몽이라면 일찌감치 버리고 

추억이라면 좀 더 즐겨도 좋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