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영화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나 보다. 예술적 영감이 정신을 흔들어놨는지 영화를 틀면 잠부터 쏟아지는 요즘이다(https://brunch.co.kr/@rhanfkaus/100 '평범한 사람이 예술 영화를 본다는 것' 참조). 물론, 숙면을 취할 수 있어서 기쁘기도 하다만, 더 이상 영화를 즐길 수 없는 운명이 된 건 아닐까 내심 불안함이 몰려온다.
온전히 아내와 함께 하는 주말 저녁, 뒷목까지 뻐근할 정도로 일상에 지친 우리에겐 아늑한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신박한 것’이 필요했다. 세계 최초로 16좌 완등에 성공한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님이 옆에서, ‘도전하지 않은 젊음은 낭비일 뿐이라구. 얼른 무엇이든 시도해!’라고 외치는 것 같다. 어이쿠, 그럼 그럼.젊음을 낭비할 순야 없지.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군. 어쩔 수 없이 신박한 도전의 대상을 찾고 있다.
호기심이 향하는 곳이 있긴 했다. 웹드라마라는 게 전부터 궁금했다. 냉정하게 나는 아직 만 29세의 새파란 젊은이라서 그런지 새초롬한 마음의 동요가 인다,“아내야, ‘여고생’이 열광한다는 웹드라마 어때? 우린 아직 어리잖아~”(아시다시피 그녀는 +3年, 한국 나이로는, 흠… 비밀).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가득한 싱싱한 젊은이의 심정으로 선택한 작품은 러브버즈(Love Buzz). 플레이리스트라는 제작사에서 만든 30분짜리 단편극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웹드라마가 아닌 ‘웹무비’라 불린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18세, 지우라는 여고생이 있다. 흩날리는 벚꽃을 배경으로 우유를 마시는 순수한 그녀는 지금 외롭다. 남녀의 애정행각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괜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나도 연애하고 싶단 말이다! 라 외치는 그녀에겐 사귀고픈 또래 친구가 있다. 4반 박승준. 딱히 그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아름다운 봄날, 옆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그녀다. 그리고 그때, 소녀에게 낯선 남자가 찾아온다. 미래에서 왔다는 그 남자. 자신을 지우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그 남자.
딱 3분이 지난 이 시점부터 나는 아이돌을 본 소녀처럼 열광하기 시작했다. ‘여고생’ 감성의 마냥 꽁냥꽁냥한 웹무비인 줄 알았더니, 시간여행 판타지 작품이었던 것이다. 터미네이터와 같은 디스토피아적 작품일지, 혹은 나비효과 같은 타임 패러독스 작품일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바웃 타임과 같이 투명하고 따뜻한 작품일지, 필연적으로 소녀의 감성을 담아 초롱초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여고생’들이 열광하는 웹무비라 유치할지도 모른다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론 유치함의 다른 표현인 풋풋함과 섬세한 아련함이 녹아져 있었다. 개연성을 따지는 냉철한 도시남자인 나도 무장해제, 날카로운 분석은 이미 포기했다. 귀엽고 산뜻한 정서와 파스텔톤의 청순하고 달콤한 분위기, 빠른 전개, 차곡차곡 쌓은 복선과 반전, 그리고 핑크빛의 아름다운 배경의 고등학교. 한 장의 예쁜 엽서처럼 다가온 웹무비였다. 이게 뭐라고 눈물이 찔끔 나는지. 숨겨왔던 깜찍한 소녀 감성이 꿈틀거린다.
예술적 품격으로 무장한 아내도 간만에 젊음을 만끽하며,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다. 엄 대장님께서 흡족한 표정으로 ‘도전하지 않은 젊음은 낭비일 뿐이지~ 훌륭한 젊은 부부구만. 허허’하고 속삭이는 것 같다.
살아가며, 해묵은 땅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보다 눈앞의 염려와 걱정에 침전하는 순간들. 가끔은 척박한 마음에 풋풋한 물을 줄 필요도 있다. 현실에 치인 질퍽한 감정의 낙차가 커지는 요즘, 스프링클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운 수분이 가슴을 적시며 미세한 설렘이 진동한다(Buzzing).
웹드라마, 웹무비란 게 당최 뭔지 궁금하신 분, 젊은 세대가 어떤 문화를 즐기는지 궁금한 분, 말랑한 감성에 취하고픈 분, 싱그럽고 화사한 분위기를 즐기시는 분께 추천. 깔끔해요. 음악도 예쁘고요. 후속작도 나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