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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무라면 Aug 19. 2019

피아니스트를 쏘지 말아 주세요.

글쓰기 1주년을 맞이하여


  여기는 황야의 무법자가 지배하는 19세기 미국의 서부. 총잡이들이 각자의 자존심을 위해 총을 겨누던, 낭만이 흥건한 개척의 시대. 당시 바(Bar)에는 손님의 흥을 돋우기 위해 피아니스트가 상주하며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잔뜩 취한 호전적인 카우보이 하나가 피아니스트를 총으로 빵야, 하고 쏴버린 것이다. 사적인 원한이나 결투의 일환이 아니라, 단지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 참나. 이후로 술집의 피아노에는 다음과 같은 쪽지가 붙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를 쏘지 말아 주세요. 그도 열심히 연주하고 있습니다(Please don’t shoot the piano player. He’s doing the best that he can!).” 무법의 시대다운 낭만적인 에피소드인가요?



   참으로 애석한 이 비극적인 역사를 접했을 때, 나는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담배 냄새 자욱한 술집에서 갈색 부츠를 신은 두 발을 탁자에 올린 채, 팔짱을 끼고 심드렁하게 연주를 듣고 있는 우락부락한 카우보이들을 앞에 두고, 삐질삐질 흐르는 식은땀과 함께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됐기 때문이다. 여전히 덜떨어진 글만 쏟아내는 자신을 보니 그렇게 느꼈다.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저 화끈한 황야의 무법자처럼 "에라이, 이런 빌어먹을 글이 있다니, 내 정의로운 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는 걸!"하고 거침없이 권총을 꺼내 들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총기 청정 국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새삼 다행이다 싶다.




   ‘글’이란 걸 쓴지 딱 1년이 되었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손가락 마디 끝이 저려올 정도로 강렬한, 알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써 내려 갔다. 골치를 썩이며 타자 치던 순간이 즐거웠고, 여백이 문장으로 채워지는 기세에 뿌듯했으며, 모르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는다니 짜릿했다. 그로써 내 존재가 다듬어지는 듯한 (괴상한) 쾌감마저 드니, 이야말로 순수하게 나를 위한 행위였다.



   언젠가 한 원로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피아노 연습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참으로 인상 깊어 뇌리에 남았다. 인간의 열 손가락은 힘이 제각기 다르다. 두꺼운 엄지는 힘이 세지만, 가녀린 새끼는 그렇지 못하다. 이런 힘의 편차를 극복하기 위해 피아니스트들은 날마다 손가락을 찢고, 힘을 키우고, 동시에 힘을 빼는 연습을 피나도록 한다고 한다. 청중의 가슴을 흔드는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자 하면, 이 같은 혹독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어릴 적 잠깐 피아노 학원의 문턱을 드나든 나로서는 피아니스트의 열성과 마음가짐을 헤아릴 도리가 없다만, 감동받은 한 명의 청중으로서 기립박수를 치고 싶어진다.



   훌륭한 연주자에 비할 바는 아니나, 내 글에도 나만의 땀이 배어있다. 피아니스트가 혼신의 힘을 다해 건반을 두드리듯,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던 시간의 흔적이 찰랑찰랑 담겨있다(고 믿고 싶다). 뺐던 쉼표를 다시 넣고, 조사를 바꾸고, 단어 선택을 고심하며, 때로는 문장을 고치기도, 문단을 뒤엎기도 했다. 덕분에 애써 쓴 글이 통째로 날아갈 뻔한 아찔한 위기를 몇 차례나 겪기도 했지만. 1년이 된 이 시점에서 새삼 ‘대견하다’는 마음이 몽클 올라온다. 그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꽤나 행복하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은(변명 같지만), 고무라면도 나름 열심히 고민하고, 읽고, 연습하며, 치열하게 쓰고 있답니다. 그러니, 장전된 권총은 얼른 집어넣어 주시길.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한 곡의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손가락을 찢는 피아니스트의 심정으로 글을 쓰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아, 참고로 자랑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래 봬도 피아노는 체르니 40까지 쳤답니다. 지금은 못 치지만요.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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