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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무라면 Aug 27. 2019

그 많던 마시마로는 어디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관하여


  퉁퉁 부은 얼굴, 쫑긋 솟은 귀, 사선으로 내려간 쪽 찢어진 눈. 맹한 표정과 오동통한 몸매. 혹시 엽기 토끼라 불린 마시마로를 기억하시는지. 나는 아주 잘 떠올릴 수 있는데.



   인터넷이 비로소 일상으로 스며들던 2000년대 초.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시 우리나라를 관통하던 키워드는 ‘엽기’였다(말하고 나니 굉장히 아저씨 같네요). 그 시대를 대표한 캐릭터를 하나 꼽자면, 누가 뭐래도 우리의 마시마로가 아닐까. 그런데 이 친구, 요즘은 어디 갔는지 통 보이지 않는다. 녀석도 사춘기가 도져 중2병스러운 거침없는 방황을 하고 있거나, 혹은 대학 진학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어처구니없는 스펙을 쌓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9급 공무원이 되고자 음습한 노량진에 처박혀있는 것인가. 도무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평소에 자주 가는 작고 조용한 카페의 한 귀퉁이에는 앙증맞은 인형들이 비치되어 있다. 이 장소의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지나, 나름 미적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허나, 나는 인형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안 주는 시니컬하고 차가운 도시 남자이므로, 세계지도가 그려진 벽면이나, 필름 카메라, 낡은 전화기, 재봉틀 등 정갈한 인테리어와 엔티크한 소품에 더 애착이 간다. 그런데 어느 날, 스쳐가는 시선에 무심코 낯익은 얼굴을 보게 된다. 마시마로였다. 그것도, 초록색 마시마로가 운명처럼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어찌하여 초록색인지,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팔짱을 끼고 녀석을 골똘히 쳐다보며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노라니, 뭔지 모를 아련함과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상이라 하면, 너무 터무니없지만 뭐 그런 비스름한 심정이었다. ‘네 녀석도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에 아스라이 떠밀렸구나’라는 생각에 살짝 싱숭생숭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존재란 것이 점점 투명해지다가 마침내 누군가에게 잊혀지고, 그 존재는 같은 자리에서 한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아주 신기하고 서글픈 감정이었다. 정작 마시마로 요 녀석은 어찌 생각할지 의문이지만.



   그렇게, 잊혀가는 것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더 이상 길에서 보기 힘든 대한민국 최초의 경차 티코도 그렇고, 어느새 자취를 감춘 아이들의 아지트 - 학교 앞 동네 문방구, 밤낮으로 새집을 주겠다 꼬셨던 두꺼비 집의 재료 - 놀이터 흙, 한 세대를 풍미했던 낭만 사나이들의 드라마 ‘야인시대’(는 쌩뚱맞나? 뭐 암튼) 등.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흐리멍텅하게 살다가도 순간, 무언가가 잊혀지는 현상을 번뜩 인식할 때면 참 이상하다. ‘일상과 비일상이 뒤얽힌 초현실 같다’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 마치 난해한 모자이크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이 또한 분명 흥미로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리 밝고 유쾌하지만은 않다.





   카페의 제자리로 다시 돌아와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식어 빠진 마시마로 플래시를 재생시켰다. 현재를 상징하는 동영상 플랫폼인 빨간 버튼, 유튜브에서였다. 과거의 환상이 깨질까 염려하며 조마조마한 채로 봤으나, 의외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심지어 꽤나 재미있었기에 한껏 몰입해서 첫 에피소드부터 끝까지 모조리 다 봐버렸다. 시간을 거슬러 잊혀간 추억을 마주하다 보니, 한동안 간과했던 점을 깨닫고야 말았다. 맞다, 이 녀석은 ‘엽기’ 토끼였지. 지난날의 회한에 젖어 나사 풀린 듯 중얼중얼 대는 나를 보고, 마시마로는 실눈을 뜬 채 ‘장난해?’라는 표정을 지을 것만 같다. ‘너 따위 녀석의 동정은 필요 없거든?’하며, 대뜸 꺼내 든 맥주병을 자신의 머리로 깨는 과격한 몸짓과 함께 말이지.



   하여간 정말로 못 말리는 녀석이라니까.

* 머리로 맥주병을 깨는 에피소드는 실제로 있으니, 너무 자극적이라 손가락질하지 말아 주세요 : )

** 그 시대의 흐름을 역행해, ‘사 달라’ 버X킹 광고를 찍은 김두한 형님(김영철 님)이 반가웠던 건, 저뿐이었나요?

제일 재밌었던 에피소드. 엽기토끼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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