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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무라면 Sep 26. 2018

「트루먼 쇼」   알을 깨야 비로소 얻는 가치

- 개인과 자유


자유인이 된 트루먼의 삶이 종국에 행복할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다만, 그가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를 선택했다는 진실, 자신을 보호하며 동시에 억압하던 알을 스스로 깨고 나갔다는 그 사실의 위대함이란.




* 본 영화의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더운 7월 중순, 일요일 아침 7시. 멀뚱하게, 그리고 황망하게 잠에서 깨어버린 나. 밤새 바짝 마른 빨래를 개며 튼 TV에 나오는 추억의 짐 캐리 아저씨, 그리고 영화 <트루먼 쇼>.


   영화를 보고, 눈에서 물방울이 볼을 타고 묵직하게 흘렀던 기억은 없다. 슬픈 영화를 보고 찔끔 짜기도 해보고, 이별 영화를 보고 몰려오는 상실감에 꺼이꺼이 울었던 적은 있어도, 이렇게 우아하게 눈물이 흐른 경험은 일찍이 없었다.


   영화 <트루먼 쇼>를 처음 봤다. 98년 작이라고 하니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공부해본 적은 있었다. 대학 입시를 위한 논술 준비 당시, 언론 통제, 정보화시대의 도래에 따른 신(新)빅브라더의 출현 등의 관점에서 영화를 학습했다. 당시에도 흥미 있게 이 작품을 눈여겨봤던 것 같다. 고교 시절 배웠던 수많은 문학 작품 중 제목조차 기억 안 나는 작품이 수두룩한 것을 생각해 보면,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단지 내용만 살짝 스쳤음에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다.


   한 개인이 자유가 억압된 본인의 상황을 인지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스스로 쟁취하는 여정을 그린 영화. 나는 <트루먼 쇼>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트루먼이 탄 작은 배는 인간의 자유,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인류 최대의 발명은 바로 개인의 자유라는 아이디어라 믿는 사람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 개념이 어째서 최고의 발명이란 말인가 묻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인류가 약 300백만 년 전에 탄생했다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인류 출현 후집단논리에 의해 찬란한 문명이 태동 ‧ 발전되었다. 그 문명은 실로 놀랍도록 위대하여 영장류와 인류를 가시적으로 구분했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이는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들의 결과물이 아닌 소수의 권력자의 뜻에 의하여 집단과 떼가 이룩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개인의 자유’라는 사상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불과 300년 밖에 되지 않았다. 과거 역사에서 인간은 집단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 즉 톱니바퀴라는 시스템에서 제한된 역할을 담당하는 하나의 톱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거대한 종교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던 중세 암흑기를 붕괴시켰던 근본사상은 라는 개인단독자로서 신과 마주해야한다는 종교개혁이었다. 이후 명예혁명, 프랑스혁명 등 절대왕권에 대항하여 개인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던 시민혁명을 통해 사상이 진보 ‧ 발전되어 지금과 같이 개인의 자유가 보편화된 것이다(여전히 많은 문화권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이슬람, 공산주의 전체주의 사회).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 권력에 대항해 싸웠고, 피를 흘렸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그 가치를 마치 공기처럼 아주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간다(4.19혁명, 6월 항쟁).




   자유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개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적 같은 권리임과 동시에 그 결과에 대해서 온전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가혹함이란 양면적 속성이 상존한다.


   영화 속 트루먼은 왜 안락한 세상에서 탈출을 시도했는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타인에 의해 감시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런 1차원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가 철저히 침해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본인의 삶을 통제하려는 그 어떤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했고,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세상을 깨고 뛰쳐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많은 것들이 보장되어 있었다. 직장, 가족, 친구, 고향 그리고 안락한 생활(비록 모든 것이 조작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인생의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출발점에서 (어느새 쇼의 관람객이 되어버린)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한다.




오늘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인사 하죠. 굿 모닝, 굿 에프터눈, 굿 나이트!”

(“In case I don't see ya! Good morning, good afternoon, good night!”)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트루먼 쇼의 총 책임자, 크리스토프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의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다. 그는 본인이 기획한 기괴한 쇼를, ‘수백만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프로그램’ 이라 소개한다. 이는 단순히 프로그램 광고가 아닌, 제작자로서의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다. 그리고 출구를 발견하고 세트장을 떠나려는 트루먼에게 그는 말한다(마치 신과 같이 근엄한 음성으로). ‘나의 세상에서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너는 새로운 세상이 두렵기 때문에 절대 떠날 수 없다.’ *1) 라고. 차가운 그의 표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트루먼을 향한 진심어린 따뜻한 애정이 느껴진다. 트루먼이 태어나는 순간, 걸음마를 떼는 감격적 찰나, 처음 이를 뽑던 사건 등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그는 트루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본인의 통제 하에 누리는 트루먼의 행복이 진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크리스토프에게 행복이란, 안정적으로 통제된 시스템 안에서 이룰 수 있으며, 개인의 자유의지는 가치 없는 허황된 망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그의 사랑과 호의를 상큼하게 무시하고,




굿바이,



새로운 여정을 선택한다.




   자유를 향한 한 인간의 갈망, 투쟁, 고뇌, 그리고 위대한 쟁취를 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트루먼은 수상한 현실을 의심했고, 견고한 안식처를 두발로 걸어 나가고자 했으며, 자신의 자유를 위해 바다공포증과 정면으로 마주했고,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우에서 기어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두려움 및 안락함의 포기라는 치명적인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자신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자유인이 된 트루먼의 삶이 종국에 행복할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다만, 그가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를 선택했다는 진실, 자신을 보호하며 동시에 억압하던 알을 스스로 깨고 나갔다는 그 사실의 위대함이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개인이라는 위대한 존재와 자유의 가치를 향한 감동의 전율이 이 활자를 타고, 모니터를 타고, 종이를 타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까지 전해진다면.




1) 트루먼이 크리스토프에게 했던 첫 말은

    "Who are You?, And Who I ?" 이었다.

    '가 누구냐는 존재론적 질문이었다.








* 본 영화 감상은 개인의 주관적 견해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 필자의 견해에 다른 생각과 주장이 있으시다면, 넓은 아량으로 비난 대신 비판, 그리고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다양한 해석을 듣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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