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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커리어연대기(3) - #문제해결

입사 5~7년 차: 문제를 해결하며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는 시기

by 도로시


이전 글에서 신입 때는 날 것 그대로 일하다가 3년 차부턴 선배들을 모방하며 일머리를 길러야 한다고 했다. 만약 제대로 일머리를 길렀다면 업무 속도도 월등히 빨라지고 일하는 센스도 생겼을 것이다. 이때부터는 직접 문제를 해결하며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 단순히 일을 많이, 빨리 처리하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마다 도움을 받거나 누가 알려준 방법대로만 일을 처리한다면 제대로 실력을 쌓을 수 없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시도해 본 경험만이 진짜 내 것이 된다. 그래서 5년 차부터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계속 부딪히며 스스로 해결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문제 해결 경험이 많다는 것은 사전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여러 가지 리스크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능동적으로 대처가 가능하며 실패의 확률도 줄어든다. 이렇게 업무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이런 리스크 관리 능력은 매니저 레벨로 올라갈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그러니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고 싶다면 꼭 이 시기에 문제를 보는 눈과, 그것을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길 바란다.





01.

나는 5~7년 차 때 힘들기로 소문난 중동 발주처 프로젝트 2개를 동시에 맡아서 했다. 이전까지는 용병처럼 손이 부족한 프로젝트 중간에 투입되어 일을 도왔다면, 이제는 프로젝트 초기 세팅부터 해보게 된 것이다. 당시 프로젝트당 30건 정도의 발주를 처리했는데, 2년 정도 조달 업무를 배우면서 발주 프로세스 자체는 손에 많이 익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단순히 입찰을 진행하고 계약서를 쓰는 것과, 아이템별 특성에 맞게 발주 전략을 세우고 실제 업체들과 협상을 진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한 번은 A라는 업체와 무조건 계약을 진행해야 했는데, 업체가 계약 조항에 합의를 하지 않아 몇 달째 지연되고 있었다. 그때 계약서 표준조항에만 100개가 넘는 코멘트가 달렸는데 도저히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두바이로 직접 출장을 가기에 이르렀다. 아침 10시. 비장한 마음으로 혼자 협상 장소에 나갔는데 상대측은 변호사 포함 8명이 앉아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여유로운 태도로 협상을 진행했다. 코멘트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장장 7시간 동안 점심도 거르고 미팅을 강행했다. 정말 지금까지 쌓아온 계약적 지식, 협상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은 계약이었다.


이 계약을 진행하면서 남들은 잘 보지 않는 계약 조항에 대해 빠삭해졌을뿐더러 웬만한 협상은 두렵지 않게 되었다. 일단 업체와 협상하는데 자신감이 붙으니, 계약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도 적극적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발주한 물품 생산에 문제가 생기면 인도든, 중동이든 날아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방법을 논의했다. 일의 가속도가 붙는 기분이었다.



02.

이 시기엔 업무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많이 다뤄보는 것만큼 회사 내부고객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설득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회의 시간>을 통해 내부 고객을 대하는 노하우를 많이 터득했다.


업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 5년 차부터 업무의 자율성이 주어지기 시작한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직접 기획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부분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때가 바로 회의시간이다. 이전까지는 회의에 들어가도 내 의견을 말할 일이 별로 없었다. 중요한 보고나 회의일수록 선배나 상사가 같이 들어가서 커버해 줬기 때문에 발언권을 가지는 게 드물었다. 그러나 5년 차쯤 되니 내 스스로 업무를 보고하거나 직접 답할 일이 많아졌다. 그만큼 회의 준비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까 봐 예상 질문과 답변을 달달 외우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꼭 1~2개씩 예상치 못한 질문이 튀어나왔는데, 그때마다 바보같이 우물거리는 스스로가 속상해서 더 열심히 공부하곤 했다.


한 번은 회의가 끝나고 팀장님이 툭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여기에 너보다 이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깐 누가 물어봐도 쫄지말고 자신 있게 대답해” 숨긴다고 숨겼는데 팀장님 눈에는 한껏 움츠러든 내 마음이 보였던 모양이다. 이날 이후로 계속 마음을 다잡는 연습을 했다. ’ 그래 누가 뭐래도 이 업무의 담당자는 나야 ‘. 그렇게 계속 부딪히고 이겨내는 연습을 통해 사회적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03.

이렇게 5~7년 차는 진짜 실력을 쌓는 시기이지만, 커리어적으로 가장 흔들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만의 업무 노하우도 생기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만큼 성장했는데, 업무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잘 보지만, 숲을 보는 건 많이 부족한 시기. 그래서 리더 레벨로 올라가기엔 아직 먼 시기. 이때가 딱 그런 시기인 것 같다.


나도 이 시기에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참 많이 했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때때로 엄습하는 불안감에 전문직 준비도 해보고, 이직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엔 남기로 결심했던 건 아직 일이 재밌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 둘 중 하나라도 맞지 않았다면 나도 다른 동기들처럼 이직을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나처럼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모내기’할 타이밍인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벼농사를 지을 때 볍씨를 논에다 바로 뿌리는 게 아니라 못자리에서 어느 정도 기른 뒤 논으로 옮겨 심는다. 이걸 ‘모내기’라고 한다. 보통 초여름에 모내기를 하는데, 적정 시기보다 일찍 모를 옮겨 심으면 품질이 떨어지고 늦으면 수확량이 줄어든다. 그래서 모내기를 할 때 모(=나)가 새로운 땅에 적응할 만큼 충분히 자랐는지, 옮겨갈 땅(=새로운 직장)은 잘 준비되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때 나는 다른 무엇보다 ‘옮겨갈 땅’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몇 군데 이직 제안을 받았지만, 연봉이나 복지는 더 나을지 몰라도 지금보다 더 성장하기 좋은 환경인지는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땅이 자신에게 잘 맞는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따져봤는데도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아직은 모내기할 때가 아닌 거 아닐까.




앞선 두 개의 글보다 이 글을 완성하는데 몇 배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5~7년 차는 나에게도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이때 골치 아픈 프로젝트들을 맡아 버겁고 힘든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잘 해결된 것도 있고, 잘 안 된 건도 있었지만 결국 남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과정들이 쌓여 나만의 노하우가 되었고, 이후 더 큰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도 나의 노하우를 잘 살려서 자신감 있게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지금 이 시기를 건너가고 있다면, 꼭 꺾이지 말고 끝까지 가보길. 그리하여 꼭 당신만의 멋진 과정들을 쌓아가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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