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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커리어연대기(2) - #모방

입사 3~4년 차: 모방하며 일머리를 갖추는 시기

by 도로시


입사 3년 차쯤 되면 일에 자신감도 붙고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어느 정도 분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시기가 일머리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적기라고 생각한다.


왜 신입 때가 아니라 3년 차쯤이 적기인 걸까?


신입 때는 좀 실수를 해도 웃어넘길 수 있다. 감정 컨트롤에 서툴러도 그러려니 한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차부터는 다르다. 이젠 웬만한 일들은 혼자 처리하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서 성과를 낼 줄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아직 그럴 실력이 없다는 것이다. 일은 자꾸 주어지는데 완벽하게 쳐낼 능력은 안되고, 상사는 계속 다시 해오라고 하는데 뭐가 틀린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 반복된다. 이렇게 벽에 막혔을 때가 다음 단계로 버전업 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이때 일하는 법을 제대로 다듬지 않으면 나쁜 습관들이 굳어져 점점 고치기 어려워진다.


그럼 어떻게 일머리를 배워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일 잘하는 선배들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보고서를 쓰고, 어떻게 말을 하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계속 관찰하며 따라 해 보는 것이다. 그게 쌓이면 자연스럽게 일머리가 생기고, 어느 순간 “얘 일 좀 하는데?”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01.

나는 공사 현장에서 신입시절을 보내다가 2년 차 끝 무렵 본사 근무를 시작했다. 현장은 워낙 거친 일들이 많으니 신입의 통통 튀는 매력과 패기가 빛을 발했지만 본사는 달랐다.


본사에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체에게 메일 하나를 보냈는데, 파트장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 메일 쓰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그때의 부끄러움이 잊히지가 않는다. 비록 현장이지만 2년을 꽉 채워 일을 했는데, 메일 쓰는 것부터 다시 배우라니. 대체 내 메일에 뭐가 잘못된 걸까? 감도 못 잡는 얼굴로 서있으니깐 파트장님이 힌트를 하나 주셨다. “메일을 쓸 때는 꼭 <수신>이 누구인지 명기해야 해.”


당시 나의 메일에는 일정한 형식이 없었다. 그냥 ‘안녕하세요 ‘ 한마디 던지고 다짜고짜 본론부터 시작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비즈니스 이메일에서는 ‘형식’이 곧 ’ 예절‘이자 ’ 회사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기준이었던 것이다. 실제 여러 기업, 여러 직급의 이메일을 비교해 보면, 글로벌 선진사 임원급으로 갈수록 이메일 formating이 완벽한 것을 볼 수 있다.


형식을 갖춘다는 것은 단순히 컴마를 어디에 붙이고, 어디서 한 줄을 띄어 쓰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완벽한 형식은 ’ 핵심만 담은 제목, Salutation-Introduction-Body-Closing- Signature 흐름의 읽기 좋은 구조, 적절한 톤 앤 매너, 간결하지만 명료한 문단‘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


나는 정말 모든 것을 다시 배운다는 생각으로 일 잘하는 선배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괜찮은 이메일이 있으면 저장했다가 따라 써보기도 하고, 칭찬받은 보고서나 레터가 있으면 형식이나 문구를 참고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선배들이 업체 만나러 다닐 때도 따라다니며 그들이 어떻게 명함을 주고받고, 어떤 태도로 이야기하는지 열심히 관찰했다. 그렇게 1~2년 열심히 하니 어디 가서 욕먹지 않을 정도의 일머리는 갖추게 되었다.


02.

모방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방의 대상’을 잘 고르는 것이다.


솔직히 신입 때는 어떤 사람이 일을 잘하는지, 어떤 면에서 인정받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어딜 가나 꼭 신입들 앞에서만 으스대며 선배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멋모르고 봤을 때는 뭔가 대단해 보이고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 빈 강정인 경우가 많다. (진짜 일잘러들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대부분 신입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그래도 3년 차쯤 되면 이런 사람들 정도는 쉽게 거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대신 이때는 7~8년 차들 중 일 잘한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눈여겨봐야 한다. 물론 회사에 더 잘 나가고, 더 인정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경험상 4~5년 위의 선배가 가장 모방하기 좋다. 2~3년 차이나는 선배들은 자칫하면 경쟁자가 되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정보나 노하우를 알려주기 꺼려하는 경우가 많고, 연차가 너무 높은 선배들은 실무에서 리더십 영역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모방하기 어렵다.


나는 4년 차 때 운 좋게도 일 잘한다고 소문난 8년 차 선배와 나란히 앉아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선배는 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물 마시러 가는 시간도 아까워 매일 아침 1.2리터 페트병을 들고 출근할 정도였다. 그렇게 일하다가도 점심은 늘 매번 다른 부서 사람들과 먹었는데, 나중에 궁금해서 물어보니 ‘일을 잘하는 것만큼 회사 내의 정보를 발 빠르게 아는 것’도 능력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늘 점심시간을 쪼개서 타 부서의 이슈나 현황들을 파악하고 있다가, 내부 고객을 상대할 때 활용해 왔던 것이다. 그렇게 1년 동안 선배와 일하며 업무 태도, 보고서 쓰는 법, 회사생활 노하우 등 많은 것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었다.



03.

보통 입사하고 3~4년 차쯤에 첫 번째 퇴사 욕구가 올라온다. 스타트업이 아닌 이상 3~4년 차는 남이 시키는 일만 해야 돼서 재미는 없는데, 일은 또 더럽게 많이 주기 때문이다. 나도 3~4년 차 때 야근을 제일 많이 했는데, 진짜 누굴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나 현타가 오곤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특정 업무 스킬뿐만 아니라, ‘일머리‘ 그 자체를 배우는 시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시기에 가장 기초인 일머리를 잘 쌓아두면 5년 차부터는 진짜 자신의 실력을 기르며 성장할 수 있다.


서예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임서 臨書‘이다. 임서는 다른 사람의 글씨본을 보며 글씨를 따라 쓰는 것인데, 추사 김정희도 어린 시절 수많은 대가들의 글씨를 임서하며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그렇게 누군가의 글씨를 계속 따라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만의 글씨체를 갖게 되는데, 거기서부터가 진짜 이 사람의 originality, 곧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자신만의 업무 스타일을 갖기 전까진 한 부서, 한 직장에서 버텨보라고 하고 싶다. 대단한 전문성이나 스킬을 요하지 않는 한, 어딜 가서 무슨 일을 하건 ‘일‘ 그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고, 내부/외부 고객을 상대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위에 적절히 보고하는 능력은 어디에나 필요하다. 이것만 잘해도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설령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새로운 업/직무 관련 지식만 쌓으면 금방 적응할 수 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어딜 가도 티가 난다. 이 말인즉슨 일 못하는 사람도 어딜 가나 티가 난다는 뜻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나는 이것이 3~4년 차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이를 키우면 금방 이해가 된다. 갓난아기일 때는 밤새 울어도, 수면이 불규칙적이어도 다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두 돌쯤부터는 진짜 ’ 인간‘이 되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한다. 밥을 제시간에 먹는 것, 제시간에 잠을 자는 것,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는 것, 하루에 3번 양치를 하는 것 등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생활습관 전반을 두 돌부터 잡아간다. 이때를 놓치면 점점 더 좋은 습관을 갖기 어렵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부디 지혜롭게 3~4년 차를 버텨서 제대로 일머리 있는, 일잘러가 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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