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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커리어연대기(1) - #날것

신입(1~2년 차): 날것으로 일하는 시기

by 도로시


나의 신입시절을 돌아보면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구분이 모호한 시기였다. 사회적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다 보니 회사에서도 불쑥불쑥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튀어나왔고, 그 때문에 밤마다 이불 킥하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자책도 많이 했다.


정도와 기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신입 때는 이러한 과정을 겪는다. 날것 그대로의 내가 회사라는 하나의 사회와 부딪히는 순간, 우리는 직장 속의 또 다른 자아를 만든다.




01.

일상의 힘은 위대하다. 처음엔 어색하기만 하던 사원증도 금세 익숙해지고, 사무실을 들어서기 전 긴장감도 한두 달 지나면 사라졌다. 그렇게 회사 생활은 빠르게 일상으로 녹아들고, 나의 경계심을 허물어 버렸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자 허물어진 경계 사이로 내 본래의 모습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좋은 면도, 나쁜 면도 그냥 필터링 없이 드러났다. 분명 나도 처음에 상상하던 사회인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일에 몰입하면 할수록 그냥 내 성격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번은 업체를 불러다가 발주처 직원들에게 기계 운전법에 대한 교육을 제공한 적이 있다. 교육전 출석표에 서명을 받고 교육을 진행했는데, 교육이 좀 부실했는지 끝나고 발주처 담당자가 짜증을 내며 출석표를 북북 찢어버렸다. 참으로 매너 없고 황당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정말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 깨달았다. 찬물을 끼얹듯 머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나는 담당자가 찢어버린 출석표를 모아서 그대로 Project manager에게 들고 갔다. 그리고 아무리 갑을 관계이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런 모멸감을 준 것에 대해 발주처에게 공식 항의를 해달라고 했다. 신입 1년 차 때였다.


PM님은 당돌한 나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시더니 발주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셨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 그 담당자는 상사에게 엄청 깨지고, 내부적으로 재발방지 교육이 들어갔다고 한다. 어쩐지 그다음부터 발주처 담당자들의 태도가 많이 공손(?)해졌다.



02.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일단 그 자리에서 담당자에게 웃으며 “말로 하셔도 될 텐데요, 다시 교육 잡아드릴게요 “허며 받아쳤을 것이다. 매니지먼트로 올려서 일을 키우면 당장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발주처 담당자들이 더 앙금을 가지고 일을 훼방 놓을 수도 있다. 누구나 상사에게 깨지는 건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같이 화내지 않고 웃으며 받아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뻘쭘해지고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다 나중에 친해지면 ”그때 그 행동 진짜 별로였다 “고 놀리며 밥이나 실컷 얻어먹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 담당자가 고작 대리 1~2년 차밖에 안 되었으니 다행이지, 부장 차장급이었으면 두고두고 꼬장을 부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진심으로 부딪히던 날들이었다. 당돌하게 들이받을 때도 많았지만, 앞뒤 재지 않고 열심히 일하기도 했다. 워낙 꼼꼼하고 완벽주의 성격이라 일을 할 때도 적당히 타협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무리해서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는 무식하게 일하는 것 말고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03.

몇 달 전엔가 “초심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왜냐하면 나의 초심은 늘 진화하고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신입 때의 초심은 날것 그대로 진심을 다해 일하는

것이었다. 좋으면 좋은 대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얼굴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미숙한 시절이었지만, 그때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졌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년 차는 그렇게 일하면 안 된다. 11년 차의 초심은 1년 차의 초심과 10년의 세월만큼 차이가 나야 한다. 나는 그렇게 2~3년 단위로 초심을 업그레이드했다.





이 글을 쓰면서 신입시절, 나를 감싸줬던 많은 선배들이 떠올랐다. 날것 그대로의 나를 격려해 주고 보호해 주며 무사히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도와줬던 많은 이들이 있었다.


분명 그때 선배들이 지금 내 연차즈음이었는데, 나는 과연 그들처럼 좋은 선배가 되어주고 있을까? 자신이 없는 거 보니 나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다. 다음 주에는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밥이라도 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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