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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Mar 08. 2017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월스트리트에서

뉴욕에서의 두 번째 날 일정 시작.


첫날 묵은 베스트 웨스턴 시포트 인 다운타운이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 맨해튼 다운타운 항구와 가깝다는 이점이 있어서 아침부터 우아한 브루클린 브리지를 보며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틀을 통으로 잡아 4시간을 채 잠을 자지 못 했다.

눈에는 핏발이 그득하고 피부까지 거슬거슬하다. 여행자 꺼풀 밑에 살포시 감춰놓았던 여자로서의 기분이 퍽 상하기 시작했다. 그때 유난히 진노랑 빛깔로 타오르는 아침 햇살이 나를 쪼아댔다. 홀린 사람처럼 태양이 떠오른 강변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맨해튼 브리지와 브루클린 브리지를 만났다.


마음이 누그러졌다. 팔랑거리는 귀만큼 단순한 나는 태양 아래 놓인 창문처럼 빛을 발하는 브루클린 브리지를 눈앞에 두고 그깟 피로 하나 때문에 뉴욕에 짜증을 부릴 수가 없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가만. 그러고 보니 여기 낯익은 곳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킬리언 머피가 사람들에게 추방 혹은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빙판 위를 걷게 하던 바로 그곳이다. 저 멀리 맨해튼 브리지가 보이는 걸 보니 영화에서는 브루클린 브리지 밑을 걷게 했던 것 같다. 영화를 볼 때는 어디가 배경인지도 모른 채 지나친 장면인데 뉴욕에 와본 후 다시 보니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는 보인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 / 저 멀리 부서진 맨해튼 브리지가 보인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 고담(배경은 뉴욕)에서 추방당하여 실제로는 브루클린 방향으로 빙판 위를 걸어가는 자.


물론 맨해튼 브리지와 브루클린 브리지를 배경으로 한 이곳이 극적인 분위기로 충만하기 때문에 촬영 장소로 선택한 것도 있겠지만, 영화 속 고담 시티에서의 추방이 실제로는 맨해튼에서 브루클린 방향으로 추방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상당히 재밌게 느껴진다.


베스트 웨스턴 시포트 인 다운타운에서 항구 방향으로 5분만 걸어 내려오면 맨해튼 브리지와 브루클린 브리지를 보며 산책할 수 있는 강변도로가 나온다.

강변도로를 조깅하는 사람들


날씨가 이렇게 좋을 수도 있나.


월스트리트의 주요 테마 영화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또 다른 영화 속 배경을 우연처럼 발견하게 되어 금세 기분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여행을 위한 예열이라고 할까. 충분했다. 어쩐지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괜찮은 예감이 든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순간처럼 긴장되면서도 흥이 솟는다.



로어맨해튼의 끝자락에서 월스트리트를 거쳐 시티홀까지 걸어 올라가 보기로 했다. 이런 날씨라면 (약간의 과장을 얹어) 브롱크스까지도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마음이 가벼웠다. 다양한 생각을 쫑알쫑알 주고받으며 거리를 구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그때, 문득 지금의 기억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는 압박감이 찾아왔다.


나는 이게 문제다. 걱정 하나 없이 아름다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그 순간을 스스로가 견뎌하지 못 한다. 감성에 너무 취해있다 싶으면 이성이 번쩍 천둥을 치며 이 순간이 끝났을 때를 떠올려보게끔 강압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여행은 진짜 현실이 아니라고 꼬집어주는 생각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여행을 하면서 여행을 바란다. 그것이 도피가 아닌 안정적인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오른쪽: 건물에 빛이 만들어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엔 벽화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햇살의 강약에 따라 그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월스트리트는 두 번째 방문이다.


6년 전 늦은 겨울밤. 친구들과 꾸역꾸역 이곳까지 찾아와 기어이 황소와 사진을 찍었다. 뿔에 매달려도 보고, 콧구멍에 뽀뽀도 해보면서 내 사진을 남기는 만족감으로 여행을 즐겼다. 어떤 의미로 황소가 유명한지 따위 전혀 알지 못 하지만 "월스트리트 = 황소"라는 공식을 어딘가에서 주워들어 아는 덕분에 마치 여행 스탬프를 찍듯 사진만 수도 없이 남기고 이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유쾌한 추억은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지만 월스트리트라는 장소 그 자체에 대한 의미는 크지 않았다.


섹스 앤 더 시티
SEX AND THE CITY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배경으로 나온 월스트리트의 한 장면(시즌 6-1). 뒤로는 트리니티 처치가 보인다.

월스트리트의 지하철 출입구만 보면 섹스 앤 더 시티 시즌 6의 첫 번째 에피소드 중 캐리가 바삐 걸어 나와 증권거래소로 달려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난 여행과 달리 이번엔 월스트리트가 주인공이다. '의미 없음'이라는 공간에 영화라는 테마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를 담은 영화는 다이하드 3편, 히치, 월스트리트, 데빌스 애드보킷, 내셔널 트레저, 춤추는 대뉴욕,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 등등 알려진 것만 해도 이미 상당하다. 이 외에도 아직 찾아보지 못 한 영화가 훨씬 더 다양하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확신도 할 수 있을 만큼 이곳은 뉴욕의 상징적인 장소이면서 곧 영화 찰영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두 편의 영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로 스탠리 도넌과 진 켈리의 춤추는 대뉴욕(On The Town, 1949),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 2012)다.





페더럴 홀 조지 워싱턴 상
Federal Hall in Wall Street

오른쪽: 월스트리트 페더럴 홀의 조지 워싱턴 상


페더럴 홀 Federal Hall 의 조지 워싱턴 상에 이르렀다.

우뚝 서 있는 조지 워싱턴이 월스트리트를 내려다보고 있고 그 골목 끝에 트리니티 처치가 마치 그림을 걸어놓은 것처럼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스팟이다.





춤추는 대뉴욕
ON THE TOWN


먼저, 춤추는 대뉴욕.


뉴욕을 대표하는 영화들 가운데에서도 이 작품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고전 뉴욕 예찬 영화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뉴욕을 진 켈리와 프랭크 시나트라, 줄스 먼신이 한자리에서 찬미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이보다 멋진 뉴욕 영화가 세상 어디에 있을 수가 있나.


오프닝은 유쾌하다. 해군으로 등장하는 세 사람이 꿈에 그리던 뉴욕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은데 주어진 시간은 하루뿐이니 다급하면서도 흥분되는 마음을 움켜쥐고 뉴욕의 굵직굵직한 대표 명소들만 서둘러 관광하는 장면이 음악과 함께 펼쳐진다. 그들은 깨방정으로 "뉴욕 뉴욕 New York New York"을 부르며 브루클린 브리지와 월스트리트, 록펠러 센터, 워싱턴 스퀘어 가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찾아가 그 앞에서 뉴욕을 당당하게 예찬한다.


뉴욕은 정말 멋진 도시지. 하루뿐이라도 뉴욕은 멋진 곳이야. 뉴욕뉴욕 ♪



춤추는 대뉴욕 (1949)


오프닝 뮤지컬 스코어 "뉴욕 뉴욕"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명소들은 세트장이 아니다. 뉴욕에 대한 사랑을 담은 영화인데 세트장에서 찍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고수하여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세 배우가 뉴욕 현장에서 직접 촬영을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1949년 작인 이 영화를 보면 약 70년 전의 뉴욕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가 당시에도 뉴욕의 대표 명소였다는 것은 춤추는 대뉴욕을 통해서도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뉴욕은 언제나 변화하는 도시라고 하지만, 이럴 때 보면 은근히 모든 시간을 간직한 채 변화를 거부하는 곳 또한 뉴욕이라는 생각이 든다.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서 있는 이 계단이, 70년 전에는 진 켈리와 프랭크 시나트라가 뛰어다녔던 곳이라니!!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또 한 편의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다.

사실 이날, 춤추는 대뉴욕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만끽했던 월스트리트는 세계적인 관광지로서 유쾌하고 멋진 아우라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영화의 프레임으로 본 월스트리트는 장소 그 자체가 한 편의 극적인 영화 촬영장인 양 엄격하면서도 장엄했다. 새삼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 이유는 월스트리트 특유의 음울하고 그늘진 분위기를 고담 시티만의 스타일로 완벽히 살려냈다는 점을 이곳에 이르러 온전히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트맨 트릴로지라는 대장정의 마지막 편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악당 베인(톰 하디)과 육체 및 정신적으로 맞서 싸우는 배트맨(크리스찬 배일)의 고난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 / 뒤로 보이는 트리니티 처치. 이 사거리에서 고담의 경찰과 베인의 무리가 첫 전쟁을 치렀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


치솟아 있는 잿빛 건물의 웅장함 때문인지 언제나 눈을 감고 월스트리트를 떠올려 보면 검은색 구름 같은 것이 뭉게뭉게 심상을 지배해버린다. 그 골목에 서 있으면 키 큰 사람 사이에 끼인 작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위축되면서 한없이 추운 느낌마저 든다. 이것은 단순히 겨울이라는 계절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소가 만들어낸 분위기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발산한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여 현재의 장소적 분위기가 된 것일 테다.

이러한 절망적 공기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 공중을 떠다닌다. 거리를 걸으며 그 맛을 음미해 보면 크리스토퍼 놀란이 트릴로지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중요한 사건의 배경을 월스트리트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 / 뒤로 보이는 조지 워싱턴 상




돌진하는 황소
CHARGING BULL


사거리를 벗어나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순서를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처음 황소를 본 건 칠흑 같은 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밝은 아침에 다시 보니 약간은 손 때가 탄 듯한 금색 빛깔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왼쪽: 월스트리트라 불리는 금융 지구 Financial District 지도


나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6년 전 그날 밤 찍었던 그 자리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고 남겼다.

비교해 볼 용도는 아니지만 사진과 사진 사이에 턱하니 놓여있는 6년의 시간을 눈으로라도 만져보고 싶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고 무엇이 변했나.


월스트리트의 황소님
Mr. 히치 -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
HITCH


'Mr. 히치 -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에는 영화가 즐겨 묘사하곤 하는 월스트리트의 못된 놈 Asshole이 담겨 있다.


그는 데이트 컨설턴트인 히치(윌 스미스)에게 사랑 때문이 아닌 단순히 원나잇 스탠드를 목적으로 여자와 이어달라고 강압하다 황소의 엉덩이에 얼굴이 박히는 굴욕을 당하고 만다.


Mr. 히치 -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 (2005)




고층 빌딩으로 인한 그림자 때문인지 꼭 그늘만 찾아 걸어 다니는 기분이다.

왼쪽: 트리니티 처치 입구. 잠깐 들어가서 기도만 하고 나왔다. 그 기도에 대한 답은 아직 듣지 못 했지만.

시간이 축적된 역사 도시이기도 한 뉴욕은 지하철 출입구 마저도 이토록 고풍스럽다.


숨어있는 듯한 스타벅스를 발견했다.

꽤 오래된 건물에 들어선 카페인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아직 모닝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어쩐지 겉절이처럼 축축 처지더라니.

냉큼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여유롭게 앉아 앞으로 찾아갈 장소들을 정리하고 여행에 관한 이것저것을 기록하면서 짧은 휴식 시간을 취했다.



주디 갈랜드의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가 흘러나왔다.

몽상에 빠져들었다. 이 따뜻한 노래에 얽힌 꿈같은 추억 속으로.


지난 뉴욕 여행, 그러니까 6년 전 12월 31일.

새해 전야제로 떠들썩하고 정신없는 맨해튼에서 나와 친구들은 입장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타임스퀘어로 들어가지 못 했다. 하는 수없이 숙소에서 작은 컵케이크로 우리끼리 새해를 축하하자는 소박한 생각을 안고 섹스 앤 더 시티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매장으로 달려가 케이크를 하나씩 골랐다. 그때 매장에서 주디 갈랜드의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가 흘러나왔다.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나 아웃사이더가 된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던 그때.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는 연말의 포근한 분위기를 되새겨주는 한 번의 포옹과도 같았다. 덕분에 그 순간이 영원한 기억으로 남게 된 것은 물론이다.


첫 번째 뉴욕 여행 때 남긴 사진





이제 세계 무역 센터가 있던 자리의 그라운드 제로로 간다.

커피 한 잔 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하루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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