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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Mar 31. 2017

커뮤니티 푸드 & 주스에서

뉴욕 영화 여행

소호를 빠져나와 늦은 점심을 먹자 했다.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묻기에 잠시 고민하다 섹스 앤 더 시티로 유명해진 브런치 레스토랑이 어떻겠냐고 대답했다. 그러나 주장을 밀어붙인 힘이 약해 원했던 곳은 가지 못 하게 됐다. 그 대신 찾아갔던 곳은, 이날의 색감과 조화로운 콜롬비아 대학가의 따뜻한 식당이었다.



허드슨 스트리트에 있는 영국 잡지 모노클 Monocle 오프라인 샵에도 들러보기로 했다.

뉴욕, 큰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은근히 손바닥 안 인가 싶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 다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겠다는 자만심이 고개를 치켜든다. 이건 사실 기분 탓일 게다. 우리는 걷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특히 여행 중일 때는 더 길게 걷고 깊게 즐겼다. 어떤 때는 걷기 위해서 여행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하루 종일 걸었다.


소방서는 처음 본다. 미드나 시트콤에서만 봤던 걸 실제로 지나가면서 보니 붉은 색감이 더 예뻐 보였다.


이제 알겠다. 뉴욕의 겨울은 아직 월스트리트에만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어쩐지 로어 맨해튼에서 어퍼 맨해튼까지 올라갈수록 가을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계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 같다. 사방이 노랗고 붉었다. 이파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빛이 물드는 느낌이다. 눈동자가 물통이라면 이 가을은 그 위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수채화 물감이다.



모노클샵은 잡지를 그대로 오프라인에 옮겨놓은 것처럼 시크하고 심플했다. 어떻게 보면 블랙으로 꾸려놓은 작은 빈티지샵처럼 보이기도 한다. 궁금하다고 해서 문을 열고 성큼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편안함을 내세우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잡지를 즐겨 보는 사람에게는 이곳이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가 쌓인 트리의 바닥만큼이나 반갑고 즐거운 장소일 것 같다. 


샵 앞에 소품처럼 놓여있는 검은색의 자전거도 예뻤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내부에는 모노클 브랜드와 관련한 온갖 소품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이달의 잡지를 포함해서 모노클 트래블 가이드북이 나라와 도시별로 진열되어 있었고 이외에도 작게는 카드 지갑과 노트북 파우치부터 거창하게는 서류 가방까지. 비즈니스맨이 좋아할 만한 소품이란 소품이 이곳에 깨알같이 집합했다. 내부 코너마다 놓여있는 미니 트리에서는 장신구와 금색 조명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나는 이것 때문에 나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분위기가 뜻밖의 포옹처럼 따뜻해서 그만.


오른쪽: 크리스토퍼 스테이션. 뉴욕의 지하철은 크게 뜨고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 1인 에스컬레이터만큼 좁은 출입구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5박 6일의 여행 기간 동안 환장하는 뉴욕 지하철 시스템 때문에 오랜만에 욕이 느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 어떤 역의 경우, 내 쪽이 잘못된 방향인 걸 깨달아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만 하면 자비 없이 다시 카드를 찍어야만 출입할 수가 있는 곳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언리미티드 라이드(일주일간 무제한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카드)였으니 망정이지 1회씩 끊어서 탔다면 내 모든 식값을 지하철 비용에 소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난 스스로 길치라거나 여행지에서 눈이 어두워지는 사람은 아니라고 (조금은 자만하며) 생각을 해왔는데 이곳 뉴욕에서는 지하철로 여러 번 패대기를 당했다. 미국까지 와서 땅굴만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열 받았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역 이름만 확인하고 들어왔다가 이곳이 다운타운 방향인 걸 뒤늦게 알아서 다시 나가 업타운 행 출입구를 찾아 들어가야 했다. (지하철마다 입구에 다운타운, 업타운 방향이 외부에 적혀 있다. 아무 입구로 들어가 내부에서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편리한 우리나라 시스템과는 달리 뉴욕은 오래된 지하철이라 그런지 일부 역에서는 바깥에서부터 출구를 일일이 확인하고 들어가야만 한다.) 뉴욕에 머무는 이 시간 동안 나는 이 불친절한 지하철과 친해질 수 있을 것인지?


오른쪽: 뉴욕 여행 내내 신명 나게 쓴 언리미티드 라이드 카드. 5박 6일의 여행 동안 서른 번은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반대 방향 출구로 찾아 들어갈 때. 이 길목에서 달려가던 자전거와 길을 건너던 남자가 부딪쳐 말싸움을 하는 광경을 보았다. 어느 나라든 말싸움의 풍경이란 다 똑같구나 생각했다. 고성이 오가고 욕도 오가고.


그래도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보면 타오르던 분노도 착 가라앉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 특유의 차갑고 고독한 분위기. 시간이 누적된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이 짜증 나게 하는 모든 불편함을 용서하게 한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내가 살아온 날보다도 긴 시간을 달려온 지하철이니까. 무언가 바뀌기를 바라지는 않게 된다. 


건너편 방향인지 내가 있는 방향의 어느 보이지 않는 구석인지. 

Somewhere Over The Rainbow가 나른하게 들려왔다. 가끔씩 이렇게 선물처럼 시간이 머리 위로 뚝. 하고 떨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되면 순간은 시간의 세례를 받은 것처럼 영원한 것이 된다.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스테이션





에덴의 정원
GARDEN OF EDEN


103 스트리트 스테이션에서 하차했다.
지금 찾아가는 곳은 콜롬비아 대학교와 그곳 학생들이 애용한다는 커뮤니티 푸드 & 주스라는 레스토랑이다. 

어퍼 맨해튼으로 올라와서 그런지 햇살은 금귤의 색으로 더욱 진해졌다. 이 정도면 석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 걸어 올라가는 중에 에덴의 정원(Garden of Eden)이라는 마켓에 눈길이 갔다. 꽃과 과일이 한 곳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 색감에 반했다고 해야 하나. 여행하면서 이런 풍경을 마주하게 되면 그늘진 공간에 햇살이 들어차는 것처럼 기분이 한없이 밝아지는 걸 느낀다. 
꽃과 과일의 경계가 무색하다. 세상엔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많은데. 신의 창조물이 지닌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도 사는 동안 마땅히 해야 하는 임무가 아닐까, 라는 거창한 생각까지 들기도 하면서 여행의 행복에 따르던 그간의 죄책감이 걷히고 잠시 동안 벅차오르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에덴의 정원. 이름처럼 예쁜 소박한 마켓 앞에 진열되어 있는 과일과 꽃의 향연.

내부에도 과일과일과일


여행할 때는 마켓이나 편의점을 둘러보는 시간이 무엇보다 행복한 순간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이 코너에서 저 코너를 돌아다니는 행위 만으로도 어쩔 줄을 모르겠다. 전부 사고 싶어서. 매일같이 이런 마켓에서 장을 보는 현지인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에덴의 정원처럼 과즙 팡팡한 이런 마켓을 누리고도 즐겁지 않다면 그건 삶의 떼가 시야마저 가려버린 것일 수도.






콜롬비아 대학교 앞에 장터가 들어섰길래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즐겁다고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새처럼 지저귄다. 그들의 충만한 즐거움이 나에게로 전이가 된다. 제3자인 여행자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장터 앞에 콜롬비아 북 스토어 있어서 들어왔다. 서점이니까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자. 이제 여기서 한탄 좀 늘어놔야겠다. 이건 귀국한 후에 알게 된 건데, 콜롬비아 북 스토어가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이 일하던 서점의 배경으로 등장한 곳이었다. 하... 글을 쓰는 지금도 한숨이 폐부를 뚫고 고통스럽게 새어 나온다. 아무리 즉흥적인 걸 좋아하는 나라지만, 영화 여행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여정이라면 사전 계획도 그만큼 중요하거늘. (사실 이날 오후의 일정은 일행을 따라 즉흥적인 것이 많았다.) 결국 나는 눈앞에 이터널 선샤인의 또 다른 촬영지를 보고도 어수룩하게 빠져나오고 말았다. 흔한 대학가 서점이구나, 라고 껄렁이면서. 그 덕분에 사진도 들어갈 때의 것이 전부다. 그 시간이 충분히 즐거웠기에 후회는 하지 않지만 아쉬움이 따르는 건 아무래도 어쩔 수가 없다.


콜롬비아 북 스토어.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이 일하던 서점의 실제 배경 장소다.





커뮤니티 푸드 & 주스
Community Food & Juice


콜롬비아 서점으로 가기 전에 커뮤니티 푸드 & 주스에 잠시 들러 이름을 올려놨었다.

여긴 점심시간도 아닌데 복작 인다. 대기 시간만 30분이라고 하길래 할 수 없이 이름만 올려놓고 콜롬비아 대학교의 장터와 서점을 먼저 구경했던 것이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현지인에게 인기 많은 카페테리아라는 걸 단번에 알겠다. 느낌이 좋았다. 


커뮤니티 푸드 & 주스 앞에 사람이 복작복작하다.

커뮤니티 푸드 & 주스


주변 구경을 마치고 카페테리아로 돌아오니 이내 우리의 이름이 들려왔다.

이 배는 염치도 없지. 뭘 했다고 이렇게 또 배가 고픈가, 살짝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이름을 듣고는 조명등이 켜지듯 반짝 힘이 났다. 내부로 들어오니 그 풍경에 마음이 일렁이듯 설레기도 하면서 작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에 너 나 할 것 없이 함께 식사를 하는 분위기, 전형적인 대학가 카페테리아의 느낌이었다. 


커뮤니티 푸드 & 주스 내부


우리도 간신히 두 자리 테이블에 끼여 앉았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입고 온 롱 패딩과 거북이 등딱지 같은 배낭이 문제가 되었다. 지나다니는 종업원이 몇 차례나, "미안한데 의자 좀 앞으로 당겨줘," 라고 요청을 해야만 했으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서 당겨 앉은 건데 억울하다. 그래도 정겨웠던 건 사실이다. 격식 없고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분위기. 사실 몇 만 원 넘어가는 스테이크 써는 집보다도 이런 곳이 더 좋다. 먹을 때만큼은 척해야 하는 곳보다 나 다울 수 있는 곳이라야 소화도 더 잘 되는 것 같다.


커뮤니티 푸드 & 주스 메뉴. 오른쪽 사진은 초점이 나갔지만...


내 오른쪽 옆자리에는 (추측건대) 교수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같은 여행자는 보이지 않았고 대학 후드 티나 잠옷스러운 추리닝을 입은 채 식사하는 현지인들만 보였다. 대단히 편안한 분위기다.



외식 때 없어선 안 되는 콜라를 시키려는데, 종업원이 이곳엔 코카콜라가 없고 대신 오가닉 콜라라는 게 있는데 그걸로 마셔보지 않겠냐고 제안하길래 두 병을 주문했다. 여러모로 완벽한 점심이 될 것 같다.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며 음식은 곧 있으면 나오고, 눈앞에는 소중한 인연과 사랑하는 콜라가 있는데 여기 없는 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오가닉 콜라. 코카콜라만큼 달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가닉이라고 해서 그런지 콜라를 마시면서도 탄산수 마시듯 건강해지는 느낌!


우리는 각각 브리오슈 프렌치토스트 컨트리 블랙패스트 주문했다.
음식은 나눠먹으면 되니까 걱정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뉴욕 여행을 하면서 먹었던 모든 식사들 가운데 가장 맛있었다. (아, 판다 익스프레스에서 먹었던 고귀한 쌀밥은 제외하고) 역시 믿고 따라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먹는 것에 유난히 욕심이 없는 편이라 음식이 줄 수 있는 행복을 잘 모른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요즘 들어 그 맛의 중요성을 알아가고 있다. 아무리 불행과 우울이라는 구정물에 젖어 있어도(때로는 죽음의 그림자까지 드리울 정도로 심연에 가라앉은 상태라고 할지라도)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 주었던 메시지처럼 그럴 때일수록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가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지 도움이 되더라. 이것이 고통 중에 신이 주신 유일한 위안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잠깐일지라도 반짝 빛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내겐 커뮤니티 푸드 & 주스에서의 식사가 곧 그런 의미였다.


브리오슈 프렌치토스트 13달러. 바삭한 토스트에 메이플 버터 맛과 캬라멜 소스를 얹은 바나나, 호두 덕분에 달달하면서도 포만감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컨트리 블랙패스트. 13달러. 계란과 감자, 햄, 빵처럼 기본적인 음식으로 구성된 세트다 보니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고소하고 맛깔나는 맛. / 팁은 전체 가격의 20% 정도로 계산해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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