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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Mar 29. 2017

소호, 그리고 라파 클럽하우스 뉴욕

뉴욕 영화 여행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소호까지 걸어왔다.

날씨가 좋으니 걷지 않는 것은 가진 것을 누리지 못 하는 하나의 죄가 될 것만 같았다. 여행 중에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작용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내겐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뉴욕 로어 맨해튼을 걸어 다니는 시간이 그랬다. 혼자였다면 기쁨의 색감이 조금은 바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약간의 우울함이 뒤섞인 글루미 소호.



캐널 스트리트 스테이션까지 이르렀다.

정말 이대로라면 할렘까지도 걸어갈 수 있겠다. 커피의 힘인지 하늘의 힘인지 아직까지는 체력도 버틸만했다.


처음엔 어떤 농담 같은 것인 줄 알았다. 할리 데이비슨 매장 앞에 어디 SNL 콩트 복장으로나 구경할 법한 가죽 재킷에 짙은 선글라스와 모자로 한껏 멋을 부린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보였다. 그깟 나이가 대수냐, 나는 할리 데이비슨을 모는 남자다. 라는 테스토스테론 가득한 공간의 힘이 느껴졌다. 멋진 사람들이다.


어떤 이벤트가 있었는지 할리 데이비슨 매장 앞에 비슷한 복장의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었다. 영화에서도 꼭 이런 인물 한 명씩 등장하지 않나. 영화 미스트에도 그런 남자 한 명이 등장하는데 그는 나름 용감하고 쿨한 역이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참.

6년 전 뉴욕 여행에서도 이 골목 어딘가를 돌아다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막상 기억을 해보려고 하면 파편적인 순간들만 사진처럼 머릿속을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를 생각할 때 인상적인 한두 가지의 장면만 부분적으로 진하게 떠오르는 것과도 같다. 어떤 때에는 그것이 어젯밤의 꿈을 떠올려야 하는 것처럼 대단한 집중과 명확한 단서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미국 동부 여행을 하면서 모든 도시에 대한 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남겼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뉴욕에서 머문 12일간의 기록은 단 하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기억의 종을 울려줄 단서도 내게는 없는 셈이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 까마득하다는 건 아직은 젊다는 증거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시간의 간격은 조금씩 벌어지게 될 테다. 20대의 나이에서 20년 전을 생각하는 건 어지간한 기억이 아닌 이상 불가능에 가깝지만, 마흔 살이 되고 쉰 살이 되었을 때 20년 전을 떠올리는 건(그러니까 지금의 내 나이) 보다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더불어 과거의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서 의식하게 되는 시기도 살다 보면 반드시 찾아오게 될 테고. 물론 궁금한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그때가 온다는 것이 그저 두렵기만 하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내 안에 다른 인간의 영혼이 들어와 나를 조종하게 된다는 것. 이 영화의 철학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면 사람이 변하는 것에 대한 잔인한 이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내가 받았던 지난 상처들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건물이나 기둥에 무심코 붙어있는 스티커와 휘갈겨진 낙서들이 소호의 공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지금은 트럼프 스티커와 그의 캐릭터가 눈에 띈다. 모든 진실 위에 군림하는 자가 트럼프라는 말을 하고 싶다는 듯이 그 스티커는 여러 낙서가 겹겹이 포개진 공간의 가장 윗자리를 덮고 있었다. 소소하고 거친 낙서가 그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뉴욕의 자유로움이 좋다.



지나가는 사람이 10명이라면 8명은 강아지와 함께였다.

순간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하나는 위안이고 하나는 고독감이다. 여기는 결혼에 대한 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혼자서도 당당하게 삶을 즐기는 것이 전혀 이상할 이유가 없는 뉴욕이라는 대도시니까(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만 보아도 그 분위기는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상처로 돌려받느니, 넘치는 사랑을 마음껏 주더라도 아픔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반려견을 믿는 그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모든 밑바탕을 외로움으로 단정 짓는 건 아니지만 혼자를 선호하고 외로운 건 사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뉴욕을 대변하는 하나의 풍경으로서 보였던 것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누군가가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가 사람인 걸 뭐.




라파 뉴욕
Rapha New York


우연히 발견했다. 자전거 용품 브랜드 라파의 매장이 뉴욕에도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타 지역이 아닌 소호에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야말로 힙한 동네에 핫한 브랜드 아니겠는가. 한때 자전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라파라는 브랜드를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닌 친구의 관심사로.


현재 라파는 한국(서울 신사동)에도 매장이 있지만, 없었을 때에는 이 브랜드의 플래그쉽 스토어를 찾아가겠다고 도쿄와 오사카까지도 찾아가곤 했었다. 사실 자전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 여기서 전문 용어를 뒤섞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라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추억이 된 브랜드 중 하나다. 우선 자전거 용품은 제쳐두고라도 맛있는 커피와 분위기 때문에라도 그렇다.


라파 클럽 하우스 뉴욕


카페도 함께 운영하는 매장이기 때문에 오랜만에 들러 커피 한 잔으로 몸이나 녹이고 가자고 했다.

분위기는 여전히 좋았다. 전 세계 라파 매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공기라고 할까. 스타벅스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특유의 분위기와 같은 것이 이곳 라파에도 있었다.


우리는 각각 드립 커피와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주문해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유리 밑에는 자전거와 관련된 빈티지 매거진이 깔려 있었다. 도쿄와 오사카가 시크한 느낌이었다면 이곳 뉴욕 매장은 빈티지 컬러 특유의 생기가 떠다닌다.



처음 도쿄 매장에 방문했을 때 놀랐던 건 화장실에 놓여 있는 에이솝 브랜드의 핸드 워시와 로션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곳까지도 브랜드의 느낌에 어울리는 소품으로 일관된 연출을 해놓은 것에서 적잖은 인상을 받았었다. 이미지를 만드는 노력이라는 것이 이처럼 섬세하게 계산적이어야 한다는 것까지 느끼기도 하면서.


메뉴판 / 카운터에 놓여 있는 에너지 바


우리 외에도 자전거와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보통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노트북으로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거나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동네 귀퉁이에 놓인 작은 카페의 개념으로 자전거를 알지 못 하더라도 누구나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의 느낌 같은 것이 이곳에는 존재했다.


통유리로 들어오는 한낮의 햇살이 따뜻하고 좋았다.

자주 들르는 듯한 사람들과 편하게 인사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직원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카페에 앉아 그동안 생각했던 걸 노트에 옮겨 적고 당장 오늘 저녁에 가볼 만한 장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번 뉴욕 여행은 모든 것이 즉흥적이었다. 순간 뉴욕에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기쁘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타임스퀘어든 브루클린 브리지든 센트럴 파크든 록펠러 센터든, 가고 싶은 장소가 그 어디든 오늘 안에 가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면서 동공이 확장되는 듯한 전율이 느껴졌다. 난 지금 소호에 있다, 무엇을 꿈꾸든 그것이 가능한 뉴욕 소호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이 나를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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